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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닷 Jun 02. 2024

내게 텃밭로망을 심어주는 사람들

마음이 고픈 날에는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어떤 날은 냉장고만 쳐다봐도 마음이 든든하다. 냉장고 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이 구역 대표주자는 누가 뭐래도 엄마. 엄마의 지인들이 텃밭에서 수확한 작물들로 만든 엄마표 도라지청, 배추김지, 파김치, 열무김치, 깻잎김치 등 우리 집 냉장고에 터 잡은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음은 대용량 음식들이 있다. 오늘은 족히 보름은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싱싱한 상추가 대형 야채통에 한가득 담겼다. 친한 선생님의 지인이 텃밭에서 기른 것이라며 나눔한 상추가 건너 건너 우리 집까지 왔다. 이 상추는 내일 또 반틈 나눠져 옆집 언니네 냉장고로 들어갈 것이다. 상추에 지지 않을 대용량 품목은 일 년 중 봄에만 먹을 수 있다는 마늘쫑. 겨울이 올 때까지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큼의 마늘쫑을 유리병 5개에 지 담아 넣어 두었다. 아버지가 친구분 텃밭에서 뽑아오신 엄청난 마늘쫑 산더미의 일부분이다. 이 역시 집밥을 즐기는 지인들의 냉장고로 대부분 이사 보낼 예정이다. 대용량이었지만 얼추 정리되어 가는 품목도 있다. 유자청. 작년 가을에 옆집 언니가 시골집에서 수확한 유자 보따리를 예고도 없이 내게 들이밀던 날. 나는 쓰던 글을 멈추고 밤새 산더미 같은 유자의 씨를 빼고, 썰어 유자청을 담아 주변과 나누었다.


유독 정성이 많이 들어가 귀한 품목도 있다. 작년에 떠나온 학교의 졸업생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참기름. 사서 선생님에게 꼭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며 참기름을 선물하겠다고 연락을 해 오신 어머님이 있었다. 김영란법도 있고 하니 그냥 마음만 받겠다고 했으나 한사코 이건 아이의 할머니가 꼭 사서 선생님에게 전해주라고 명했다며 막무가내셨다. 졸업까지 한 마당에 무슨 상관이냐며 단호하셨다. 어쩔 수 없이 그럼 딱 한 병만 감사히 받겠다 했더니 유리로 된 커~다란 맥주병에 가득 담긴 참기름 한 병이 내게 왔다. 할머니께서 식구들 먹이려고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깨를 볶아서 만든 귀한 참기름이라 했다. 참기름에서 진한 사랑이 느껴졌다. 이에 밀리지 않는 음식이 있으니 바로 땅콩버터. 지인의 텃밭에서 캐낸 신선한 햇땅콩 보따리가 흙도 채 마르기 전에 여동생의 집에 도착하던 날부터 그녀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이 많은 땅콩을 다 어찌한단 말인가... 대용량 땅콩을 가공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메뉴는 땅콩버터. 여동생은 땅콩 걷껍질을 까고, 볶아서, 다시 속 껍질을 까고, 이걸 갈아서 땅콩버터를 만들었다. 믹서기가 과열되면 갈다 멈추기를 여러날 반복하며 땅콩버터를 만들었다. 동생은 수많은 병에 나눠 담은 땅콩버터를 주변에 나눔 했다. 그 귀한 땅콩버터가 건너 건너 우리 집에까지 당도한 덕에 아들의 최애 소스가 되었다.


내 지인들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텃밭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매년 봄이면 아파트 베란다 대형 화분에 고추, 토마토, 상추 등 각종 모종을 심어 보지만 웃자라기만 할 뿐 수확이라 할 만한 결과물은 드물다. 진짜 땅의 기운으로 작물을 왕성하게 키워내는 텃밭의 풍성함에 비할바가 못 된다. 텃밭 가꾸는 사람치고 그 작물을 혼자 다 먹어치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텃밭에 작물들은 언제나 1인분 보다 많고, 그냥 버리기엔 너무 너무 귀하다. 그 많은 작물이 절로 자라서 그리 풍성한 수확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눔 받는 사람은 상추 한 장도 허투루 욕심낼 수 없다. 그러니 넘치면 또 나눌 수밖에. 텃밭은 나눔을 불러일으키는 신기한 이름이다. 농사꾼이 될 용기까지는 없지만 언젠가 손바닥만한 텃밭 한 조각 정도는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내 것이 풍성히 넘쳐흘러서 기꺼이, 아낌없이 주변에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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