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대장 May 03. 2021

과거의 내가 믹서기에 갈리듯 갈려져서 만들어놓은

지금의 나

어제처럼 종합자료실에 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다른 일이 주어졌다. 기증할 책을 가져오신 분들에게 1인당 과월호 잡지책 5권과 포장해놓아서 포장지 안에 어떤 책인지 알 수 없게 만든 책 1권을 드리는 이벤트 안내자가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일이 더 추가되었다. 도서관 이용자분들께 책 커버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해주는 것 까지.


업무 내용을 간단하게 안내받고 3층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 책상과 의자를 가지런히 놓고 앉았다. 그리고 책을 기증하는 분들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근무하는 4시간 동안 책을 기부하시는 분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려 4시간 동안 앉아서 책만 읽다 온 꼴이 되었다. 이럴 수가...


책 기증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또 다른 누군가의 기증된 책중에서 클림트 그림에 대한 책을 읽었고, 고교 독서평설 2019년 11월분을 조금 읽었다. 클림트 그림 중에서도 유디트에 대해 살로메와 비교한 부분이 재밌었다.


과월호 잡지들을 뒤적거리다가 독서평설을 보게 됐는데, 청소년들이 읽는 독서평설이 이렇게나 재밌는 건 줄 처음 알았다. 고등학생 대상이라고 하기엔 수준 있는 글들이 많았고, 소설을 소개하고 해설 부분도 있어서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읽었다.


오늘 근무는 도서관에서 책만 읽다 돌아가는 기분이라 좀 멋쩍기도 했다. 퇴근시간 1분 전에 담당자분께 퇴근 눈도장을 찍고 정각에 퇴근을 했다.



시급 노동자의 삶을 체험 중인 요즘, 일과 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해보게 된다. 작년까지 회사를 다녔었고, 퇴사 전까지 10여 년 동안 회사를 5군데 다녔지만 첫 회사 빼고는 퇴근시간에 퇴근을 못했었다.


무조건 야근을 해야 돼서 저녁 식대는 제공이 됐지만 야근수당이 따로 없었다. 급하다는 이유로 매일 야근을 했었는데 나중 돼서 돌이켜보니 그냥 일을 많이 시키려 한 것이었다. 그렇게 매일 10시간에서 12시간씩 근무를 했었다.


마지막 회사에서 야근을 하다가 내 월급을 시급으로 따져보았을 때, 1만 원이 겨우 나왔었다. 그때의 내 기분은 몹시 억울했고 진짜 슬펐다.


오늘 도서관 퇴근길 발걸음이 유독 가볍고, 즐겁고 신났던 이유에는 과거의 내가 믹서기에 갈리듯 갈려져서 만들어놓은 지금의 내가 있기 때문이라 여겨본다.


'집에 가서 어서 내 일을 마무리지어야지. 절대로 다시 취업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지.' 걸어서 퇴근하는 동안 퇴근하고 싶어도 퇴근할 수 없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지금의 내 삶이 계속  이어나가기를 간절히 바랬다.


2020.09.26. 토요일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끝나지 않는 도서관 단순 노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