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리누나 Apr 18. 2024

사십 구일. 열 달의 시간 동안

오렌지 한 조각


오늘은 출산 후 몸조리를 할 조리원에서 여는 산모교실이 있던 날이다. 같은 조리원을 예약한 사람들 중 비슷한 출산 시기 산모들을 여럿 모아서 친목 도모를 돕는다는 취지라고 하시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혹시 뭘 판매하시려나 싶은 약간의 의심과 함께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총 6명의 산모들이 모였다.


병원과 조리원에 관한 짧은 영상에 이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조리원 규칙이나 준비물, 조리원에서의 스케줄 등 다양한 질문이 나왔다. 그러고 나서는 한 명씩 아가에게 간단한 태담 들려주기를 시키셨다. 미니 마이크를 잡고 배를 쓰다듬으며 아가한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모습을 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이었다. 병원 측에서 필요했던 건 이를 이용해서 홍보 영상을 만드는 것인 듯해서 조금 불편했지만 대놓고 물건 판매 같은 건 아니니까 뭐. 그런데 남편이랑도 잘 안 하는 태담을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하려니까 엄청 쑥스러워졌다. 그런데 다들 준비한 것처럼 말을 잘하셔서, 앞선 분들의 말을 짜깁기하면서 나도 내 차례에 어떤 어떤 말을 하기는 했다.


“…… 엄마가 아빠 따라 처음 살아보는 곳에 와서 적응하기 좀 힘들었는데, 아가가 와줘서 임신 기간 동안 행복하게 보내고 있어. 만날 날이 얼마 안 남으니까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다. 건강하게 만나자!”


앞머리는 진부한 말들이었으나 마무리는 정말로 내가 아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나온 것 같다. 식사를 마친 후, 오래간만에 낯선 이들과의 대화로 에너지가 조금 빠졌는지 혼자 근처 카페를 찾았다. 얇아진 옷차림에 내 배가 더 커 보여 당장 다음 주라도 낳을 것만 같았는지, 카페 사장님은 예쁘게 자른 오렌지를 담은 접시를 내어주셨다. 달큼한 오렌지를 먹으며 찍은 영상을 이메일로 보내주셔서 카페에서 켜 보았는데 얼굴이 화끈 창피하다. 그런데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주책맞게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타지에서 일도 뭣도 없이 지내는 것은 생각보다도 많이 힘들었기에, 방황하고 자주 우울해하던 나에게 남편은 아기를 가지고 낳으면 훨씬 나을 거라고 했었다. 그때는 그 소리가 ‘너의 무료함을 아이로 달래라.’ 혹은 좀 더 극단적으로 ’ 너의 커리어는 나중에 생각해라.‘라고 해석되어서 나는 더 화를 내곤 했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시간과 에너지가 허투루 증발해 버리는 것 같은 상황의 내게 남편의 해결방안은 정녕 그것뿐인가 싶어 실망과 서운함도 생기고 말이다. 여전히 나중에 다시 어떤 식으로 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기가 옴으로써 내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재정비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얼마 뒤면 오늘처럼 좀 힘들다고 혼자 카페에 들어가서 충전하거나 또는 낮잠을 잔다거나 이렇게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어려울 테지. 하지만 산모에게 왜 10개월의 시간이 주어지는지 생각했다. (물론 아이에게 그만큼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 당연한 소리 같지만) 당황스럽고 불안한 초기를 넘어 익숙해지는 중기, 그리고 이 순간에도 딸꾹질하는 소리, 꼬물거리는 손발이 눈에 보일만큼 자라 궁금해지는 말기까지 엄마에게 아이를 만날 준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한다. 만약 인간의 몸이 서너 달만에 아이가 나올 수 있었다면, 아가도 엄마도 서로에게 애착도 준비도 충분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와 줘서 고마워.


라는 거 다들 하는 말인데, 진심이라서 그렇다는 걸 오늘 많이 느낀다 아가야.







작가의 이전글 오십일. 먼 가족보다 가까운 친척이 고마운 오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