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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뜰 Jun 07. 2019

이번 생은 망고 덕후 (1)

이. 생. 망 : 인생 망고와의 조우

태국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것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망고를 꼽겠다. 당신이 만약 망고 덕후라면 태국에 가야 한다. 이. 생. 망의 새로운 정의, 외쳐! 이번 생은 망고 덕후!



  동남아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랑말랑하고 샛노란 과일, 망고.

  엄마의 십 대 시절에는 바나나가 무척 귀했다는데, 십 대 시절의 나는 아예 망고의 존재조차 몰랐으므로 망고는 바나나보다 더 진기한 과일이었다. 그런 과일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다가, 스무 살이 넘어서야 겨우 망고향이 든 음료나 냉동 망고를 맛보면서 나는 망고란 이런 것이구나, 어렴풋이 생각했다.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식감이 말랑하고 때때로 새콤한 과일. 그마저도 생과일로 먹어본 일은 없어서 생망고는 어떤 맛일까 내내 궁금했다. 수입 망고는 비싸서 먹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처음 생망고를 먹어본 것은 필리핀. 망고를 갈아낸 100% 생과일주스를 맛본 나는 꾸덕한 그 식감에 다시 한번 마음 깊이 망고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이게 과일이라고? 아무래도 과일이라기보다는 가공한 유제품, 이를 테면 크림치즈 쪽에 더 가까운 느낌인데? 나무에서 이런 게 열린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필리핀에 있는 동안 틈만 나면 망고 주스를 마시고, 건망고를 끼니처럼 냠냠 뜯어먹었다. 웃긴 것은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생과일 망고를 사서 먹어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망고향 음료에 길들여진 내게 생망고 주스는 나의 망고욕을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게다가 마트에 갈 때마다 쫄깃한 식감의 건망고를 부지런히 사재기해두기까지 했으니, 1일 1 망고를 넘어 가히 망고 중독 수준이라 할 만했다.



  그런 내가 태국에 왔다.

  길거리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마트에서... 어디서나 망고를 볼 수 있는 태국. 게다가 태국 망고는 크기가 크고 당도가 높기로 유명했다. 태국에 3주간 머물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망고를 먹었는데, 그중에서도 '인생(!) 망고'라 할 만한 망고를 만난 곳은 로컬 시장의 한 과일 가게였다.


  대부분의 경우 여행에서 비행기표를 제외하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숙박비. 한 번은 숙박비를 절약하기 위해 시내와는 다소 떨어져 있지만 가격이 싸고 시설이 깔끔한 비즈니스호텔에 묵었다. 과연 전 세계 여행객들의 평가대로 호텔은 쾌적하고 효율적이고,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아무것도'라고 함은 외국인을 위한 시설이 전무함을 말한다. 호텔에서 받은, 주변 시설을 소개한 지도를 보니 호텔에서 조금 걸어가면 편의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뿐, 둘러볼 곳은 물론이고 영어 메뉴판을 제공하는 식당도 거의 없었다.


  다행히(?) 이런 곳을 좋아하는 우리는 동네를 수시로 돌아다녔다. 복잡하게 얽힌 도로와 무엇을 파는 것인지 짐작할 수 없는 가게, 홀더 모양의 비닐봉지에 음료를 끼워 걸어둔 오토바이 손잡이, 어떻게 구분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흐늘흐늘한 문자들을 틈에서 우리는 이방인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그러던 중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장에 다다랐다. 호텔에서 일러준, 4시에서 7시까지만 반짝 열린다는 로컬 마켓이었다. 오가는 사람들, 들뜬 분위기, 줄줄이 늘어선 과일이며 생선들. 자연스럽게 들어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문득문득 따라붙는 상인들의 눈길을 느끼며 시장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내 손바닥보다 더 큰 망고가 가득 쌓인 과일 가게를 발견했다. 노랗게 잘 익은 데다 통통하고 말랑말랑해 보였다. 망고를 가리키며 주인아주머니에게 '하우 머치?' 하고 외쳤다. 낯가림을 이긴 망고욕이었다.


  아주머니는 능숙하게 계산기에 숫자를 찍어 보여주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한 개에 900원 꼴! 아니 세상에?! 이건 사야 해! 고개를 끄덕이며 사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니 망고 몇 개를 만져보곤 비닐에 거침없이 담아주셨다. 커다란 망고를 들고 한 달음에 달려와 캐리어 한편에 꽁꽁 숨겨둔 세라믹 칼을 남편에게 건넸다. 분명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해 체크리스트에 써가며 챙긴 준비물이었다.


  나로서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라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남편은 망고를 요리조리 돌려보더니 과감하게 한 면을 슥- 베어냈다. 달큼한 망고향이 확 퍼졌다. 뼈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씨앗을 중심으로 양쪽 면을 베어낸 후 격자 모양으로 단면에 칼집을 내고 과육이 튀어나오도록 아래쪽을 누르니 SNS에서 보았던 바로 그 비주얼이 되었다. 초콜릿처럼 톡톡 튀어나온 망고 조각을 포크로 떼어내어 먹었다.



  그 맛은, 내가 이제껏 먹었던 그 어떤 망고보다 훌륭했다.

  이것을 먹기 위해 이곳에 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필리핀 망고(카라바오)는 새콤한 맛이 나는 데 비해 태국 망고(남독 마이)는 단 맛이 더 강하고 새콤한 맛이 거의 없었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이게 단돈 900원이라니... 한국에서 망고 서너 개가 만 원임을 떠올려보면 여기는 정말 망고 덕후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 분명했다. 이 맛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망고 한 조각 한 조각을 소중하게 떼어먹었다. 언젠가 나는 다만 망고를 먹기 위해 태국에 다시 올 것이 분명했다. 마찬가지로 이 역시 내 인생에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이. 생. 망(이번 생은 망했어요)'의 새로운 정의, '이번 생은 망고 덕후.'

  망고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한, 적어도 나의 이번 생은 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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