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 나이트>
히어로 무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능력으로 악과 맞서 싸우는 류의 영화다. 보고 있으면 통쾌하다가도 이내 현실로 눈이 돌아온다. 화려한 CG가 주는 감동은 영화를 보는 순간 그때뿐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는 다르다. 히어로 무비 중에선 손에 꼽고, 배트맨 시리즈 중에선 가장 좋아한다. 흡사 히어로 무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선 배트맨 슈트와 무기는 주인공 브루스 웨인이 차고 넘치는 부자여서 특수 제작한 것들이다. 초능력자는 아니란 얘기다. 물론 핵심은 이게 아니다.
영화는 '배트맨'이라는 영웅이 수호하는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영웅의 존재는 찰나이고, 영웅이 실현한 정의는 유한하다는 점을 꼬집는다. 배트맨은 고담시를 지키는 히어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다. 배트맨이 어둠이 깔린 도시를 지킨다면, 낮의 기사를 자처하는 건 하비 덴트라는 정의로운 검사다. 그는 배트맨 못지않다. 고담시를 장악한 마피아들을 잡아들이고, 재판에 세운다. 배트맨은 하비 덴트라는 실재하는 존재가 영웅이 되도록 돕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타락한다. 조커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서다. 사회의 정의를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은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두 얼굴의 하비 덴트가 되어 폭주한다. 자신을 엿 먹인 부패 경찰들을 찾아가 겁박하고, 죽인다. 영웅이란 존재가 갖는 한계는 여기서 드러난다. 영웅으로 추대받던 그가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어떨까. 정의로운 검사는 사라지고, 도시는 다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제도와 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던 그가 정반대로 이를 거스르는 범죄자가 됐으니 말이다.
영웅이 세상을 지키는 방법은 쉽다. 반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건 어렵다. 하비 덴트 검사가 애인을 잃은 건 악당이 주도한 일이지만, 부패한 경찰이 가담했다. 다음에도 비슷한 사고를 막으려면 시스템을 손봐야 한다. 경찰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살피고, 이후엔 경찰 내규부터 새로이 제도와 법을 고쳐야 한다. 영웅의 일격이면 단죄가 가능한데 반해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럼에도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비 덴트가 보여주듯 영웅 한 사람에 기댄 정의는 바람 앞의 등불 같다. 악의 역습 한 번이면 사라진다.
우리 사회를 지키려면 법과 제도와 같은 시스템을 논해야 한다. 제도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생겨났다가 다시 고쳐지고 그런 끊임없는 과정을 반복해 정립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함께하는 건 주권자인 우리 모두다. 우리가 세운 법과 제도로 우리 사회를 지키는 것, 영웅 한 사람이 아닌 시민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사회. 로빈 형사가 배트맨에게 가면을 쓰는 이유를 묻자, 이런 대사를 남긴다. '누구라도 영웅이 될 수 있는 사회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