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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광래 Jul 04. 2022

일의 기쁨과 슬픔

주간제조도 후기

“광래야. 너는 왜 일을 하니?”

 술기운을 꽤 많이 걸친, 붉어진 얼굴과 살짝 감긴 눈 사이에서도 입술의 말은 분명했다. 이따금씩 그런 사람들이 있다. 기어코 내 진심을 알아보고야 말겠다는 태도. 시니컬해보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내겐 그런 식으로 선을 넘었다. 나는 엷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글쎄요.”

 그 미소가 쓴 맛인지 집에 가는 길이 쓸쓸하게만 느껴졌던 적이 많다.


 일을 왜 할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한번 쯤 생각해봤으면 하는 주제이다. 우리는 꽤 많은 것들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어쩌면 선택된 경우들도 많다. 특히 하루의 절반 이상을 쓰는 회사 생활도, 자신이 선택했다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선택됐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획일적인 교육 탓, 치열한 경쟁과 부적절한 평가 탓으로 돌리곤 한다. 하지만 한 번 묻고 싶다. 정말 그렇게 해서 마음이 편했는가? 진정으로 편했나?


 나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해 꽤 많은 시간을 헤매고 있다. 남들이라면 정진해서 자리잡았을 30대에도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8번째 조직으로 향했다. 그 덕에 내겐 차도, 집도, 직급도 딱히 주어져 있지 않다. 겨우 갚아나가고 있는 월세 보증금이 약간의 내 자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불안함이나, 두려움 없이 이 과정을 흠뻑 즐기고 있다. 요즘은 나를 걱정하던 친구들이 오히려 정체성 혼란으로 퇴사와 씨름하고 있는 일이 잦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괜찮은 것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조도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제조도, 그러니까 잼있는인생을 운영하는 예지님은 동아리 선배이다. 그것도 꽤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정확히 말하자면 상상 속 첫인상이 별로였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마주한 2016년 여름, 나는 오히려 무언가 신기함을 느꼈던 것 같다. 날카롭지만 날이 서있진 않은, 강직하지만 딱딱하지 않은, 오묘한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녀는 대뜸 내게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가 있으니, 그 기회를 나에게 사용해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보문동 잼있는인생 사무실은 흔한 기기 지원 하나 할 수 없는 재정 상태,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 178의 큰 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다 펴지 못하고 들어가야 하는 사무실 입구까지. 아, 하나 더. 화장실도 옆 건물의 아주 수치스러운 화장실을 이용해야만 했다. 이렇게만 바라보면 좋소기업 아니냐고? 글쎄, 나는 그 회사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 있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으로만.


 내가 회사에서 한 일의 80%는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필요한 노동에는 군말없이 따르는 편이었지만, 예지님은 끊임없이 내게 이유를 물었다. 작은 생각도 응원해주고, 이해가 안가면 이유를 묻고, 부족한 부분은 지원해줬다. 이렇게만 말하면, 천사 같은 사장이겠지만, 그녀가 어김없이 불호령을 내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대충’이었다. 대충 이정도면 되겠지 생각한 것들은 어김없이 거절당했다. 평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나와의 언행이 조금 더 쿨했던 탓인지 몰라도, 정말 가감없이 발가벗겨진 적도 많았다. 그렇게 눈치만 보는 한 달, 숨이 막히던 한 달을 지나, 조금 근육이 쌓인 것 같은 한 달이 찾아왔다. 이제 일을 해볼까 싶은 순간, 그녀는 내게 어울리는 기회가 있다며, 나를 바깥으로 내몰았다. 어쩌면 그 아쉬움이 나를 다시 제조도로 불러들였던 것 같다.(나는 2017년에 한 번, 2020년에 한 번 더 제조도에서 일했다.)


 그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내가 그녀에게 배운 것은 ‘왜’였다. 그녀는 어떤 행동도 이유 없이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것을 이유 없이 수용하던 나는 그게 일을 잘 하는 태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뇌를 빼고 하는 일은,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지금 회사에서 팀장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하다못해 빨대를 만드는 일도, 대충 해서 되는 것은 아니야.”

work라는 단어에는 일 말고도 작품이라는 뜻이 있다. 어쩌면 일과 예술은 닮아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일을 하나의 종합예술이라 불렀다. 우리가 부족한 실력의 유명인들이 그려내는 작품들을 비난하는 이유는 거기에 담긴 정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는 일에 정성을 다 하고 있는가? 나는 그렇게 혼나고도 여전히 가끔 이유를 놓친다. 가끔은 긴장한 탓에, 가끔은 나쁜 컨디션에, 가끔은 그냥 귀찮아서, 그렇게 이유를 놓친 것들은 어김없이 대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대충한 것이 좋게 나올 리가 없다. 나도 정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나도 답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유 없이 하던 것들은 여지없이 대충으로 이어졌다. 지금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일의 이유를 ‘잘 살고, 잘 크고, 잘 되고 싶어서’라 정의한다. 이것이 정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이유가 있는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은 결국 성과로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제조도는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직접 마주한다. 아주 원초적인 것부터 말이다. 이유를 찾기 위해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냥 했기 때문이다. 일을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그 일을 어쩌다가 하게 되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감히 추측컨데, 주간 제조도를 적으며, 많은 조직원들이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그 일을 왜 하는지를 어렴풋이라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 화와 마지막화를 비교하면 그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다. 자신의 업무를 간략하게만 적던 도민들, 마지막 화에서는 업무 내용만으로도 한 페이지가 가득해진다. 과연 일이 그만큼 늘어나서일까? 늘어난 일 탓도 있겠지만, 본인이 인식하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해야 탐구할 수 있다. 발 빠른 제조도민들은 이미 탐구하고 있겠지만, 늦었다고 생각해도 걱정하지 마시라, 알게 된 이상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탐구라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무의식이 결정한다고 한다. 사람이 생각하는 만큼 이성은 똑똑하지 않다. 대부분의 것들을 감정과 무의식으로 결정해버리니까. 하지만, 그 무의식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그것은 습관과 기억에서 온다. 주간 제조도는 제조도민들에게 자신의 일을 인식하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확인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습관으로 만들게 했을 것이다.


제작자인 시리님의 기억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고, 그녀의 습관도 더 강해졌을 것이다. 아마, 이미 그 길에 들어선 시리님 앞에 더 이상 어려운 일은 있어도, 못하는 일은 없겠지. 그녀는 이제 매일 고통받을 것이다. 이유를 따지게 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행복을 발견하기 때문에, 기꺼이 걷고 싶을 것이다. 이미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인 것 같지만.


주위 사람 다섯명의 평균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제조도에는 이미 두명의 일잘러가 보장되어있다. 백명 중 한 명 만나기도 어렵다는 그 존재를 두명이나 보유하고 있으니, 평균이 얼마나 올라갈까. 그리고 가장 큰 무기, 업무일지라는 문화가 자리잡았다. 습관보다 강한 힘은 문화다. 제조도는 이제 자신의 업무를 더욱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따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은 머리 아프고, 힘들고, 지칠 테지만, 오히려 더 단순해지고, 쉬워지고, 즐거워질 것이다. 그것이 예지님이 늘 말하던 ‘춤이나 추자’는 말이라고 느낀다.


내가 왜 일하는 지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다시 또 만날 날을 기원하며.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


왜 일을 하시는가? 본인의 선택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선택하지 않는가?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혹시 일을 안하시는 건 아닌가? 아니라면, 그래. 왜 일을 하시는가?


전체보기(주간제조도는 1화부터 봐도 재밌습니다.)

https://stibee.com/api/v1.0/emails/share/M4qQyr8Ahb7xBXJptll9tFcnt4AUi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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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후기


제조도에서 퇴사한 내게 요청해주신 글. 요청받은 글을 쓰는 일은 부담스럽지만 기쁜 동력이 된다. 특히, 요즘같이 글을 써내기 어려운 순간에는, 누군가가 기다린다는 게 글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까. 글은 읽히기 위해 존재한다. 그 명제만큼은 누구도 침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읽히지 않는 글은 외로운 글이다. 그렇기에 읽는 일도 늘어야 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게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 서로의 외로움을 붙잡으면서.


이 글을 쓰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내가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의식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의식하는 것들을 멀리한다. 의식하지 않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를 해내는 의지가 부족하기에, 무언가를 해낼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뛰어든다. 그렇게 해야만 겨우 하는 것들이 있다. 의식하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던지고 무너지고 도전하면서 겨우 해내고 있는 일들이다.


내가 가진 것들을 버려낸다는 건 어렵다. 뱉은 말을 지킨다는 건 어렵다. 지킬 수 있는 말만 한다는 것도 어렵다. 결국 말은 어렵고, 글은 그나마 쉽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이예지는 그런 사람이다. 뱉은 말을 지킨다. 다 지킨적은 없지만, 지키고, 못하면 아주 무섭게 사과한다. 그런 사람에게 건네는 글에 한점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마음에 전시해둔 사람들의 행태를 따라간다. 행동을 먼저 한다. 그러면 마음은 변한다. 나를 제한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변할 수 있다. 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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