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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목 Jun 26. 2021

차별금지법과 혐오

폴라리스, 네 번째 편지.

✉ 에디터 레터

억압과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기구의 이름은 ‘진리부’였습니다. 자국민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 군사독재 정당의 이름은 ‘민주정의당’이었죠. 북한에선 한국 전쟁 종전일이 ‘조국 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하네요.


‘사랑하니까 반대한다’는 식의 모순을 마주한 것은 서울 퀴어 퍼레이드에서의 일입니다. 시청역에서 퍼레이드가 열린 잔디광장으로 들어서기 위해선 통과의례처럼 ‘차별금지법 제정 결사반대’가 적힌 팸플릿을 받아 들어야 했고, 광장 앞에 운집한 보수 개신교도들의 스피커 차에서 나오는 선전을 들어야 했습니다. ‘돌아오라, 회개하라.’, ‘사랑하니까 반대한다.’... 성소수자들은 펜스 너머에서 울며 소리치는 개신교 신자들을 향해 ‘울지 말라’고, ‘괜찮다’라고 말하며 그들을 다독였습니다. 부정당하는 이가 부정하는 자를 다독이던 모순은 지독했습니다. 그날의 시청 앞 광장은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하는 이유를 동시에 보여주는 밀도 높은 회화 같았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거울삼아 제 한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저의 한계는 명확했습니다. 저의 공감 능력은 군부가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미얀마 양곤까지 도약하지 못했습니다. 엊그제 만난 가장 오랜 친구의 고민에도 충분히 공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나와 보수 개신교도의 차이는 다만 공감의 한계선을 어디에 그었는가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나도 누군가에겐 퀴어 퍼레이드 반대 집회 주도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 것인가.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p.28)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 속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한계에 힘이 닿는 대로 부딪혀보는 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슬픔 공부에 폴라리스가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주의 주제는 ‘차별 금지법’입니다.


2021.06.21. 월요일

에디터 안목 드림


이번 주 폴라리스에 담긴 질문들  

- 혐오라는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

- 차별금지법의 의의와 역사

- 왜 그동안 차별금지법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나

- 차별금지법 이후의 과제


여는 글  


"더는 못 들어주겠군. 우리가 노예제로 병든 국가를 치유하고, 이 끔찍한 전쟁을 끝내기 전까지는 인간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는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소. 여러분이 알든 모르든, 난 알고 있소. 이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수정헌법 제13조가 바로 그 치료제라는 사실을!"


I can’t listen to this anymore. I can’t accomplish a Goddamned thing of any human meaning or worth until we cure ourselves of slavery and end this pestilential war, and whether any of you or anyone else knows it, I know I need this! [Thirteenth Amendment] is that cure!


에이브러햄 링컨  

- 영화 '링컨' 중에서


이미지 ©네이버 영화 


*미국 수정헌법 제13조는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범죄자를 제외하고서 비자발적인 예속을 금지시킨 미국 헌법 수정 조항 중 하나다. © 위키피디아



혐오는 단일의 감정이 아니다.

 숙명여대에서 A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핵심 논거는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로 압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안전에 대한 요구였다. 남성이었던 A씨와 강의실과 화장실 등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혐오 감정은 보통 역겨움 반응을 동반하지만, A씨 입학 반대 주장에는 그녀의 정체성을 역겨워하는 뉘앙스가 없다(역겨움은 보통의 남성 문화에서 게이와 트랜스젠더에게 흔히 드러내는 반응이다). 역겨움이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공격적 반응이라면, 두려움은 좀 더 방어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라는 이분법이 직관적으로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유는, 이것이 역겨움과 두려움의 대조, 공세와 수세의 대조, 남성 문화의 트랜스젠더 혐오와 여성 문화의 두려움이라는 대조를 깔고 있어서다. 이 이분법 구도에서는, 트랜스젠더 A씨가 (다른 대학도 많은데) 굳이 여대를 다닐 권리와 숙명여대 재학생들이 안전할 권리가 충돌한다. 명백히 안전할 권리가 우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혐오에 대한 역사적, 인지과학적, 법철학적 연구 결과는 ‘혐오 대 두려움’이라는 이분법을 지지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혐오는 거의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했다. 인지과학적으로 보면, ‘미움 회로’는 두려움 반응을 관장하는 편도체를 함께 활성화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역겨움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게 혐오가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 천관율, “혐오, 선을 넘다”, <시사IN>

차별과 배제, 혐오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논리는 종이로 쌓은 벽과 같아서, 그 벽을 한 꺼풀만 까보면 결국 어떤 원초적인 감정만이 꿈틀대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감정적인 것은 곧 비이성적이라고 몰아세우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감정(혐오, 두려움, 낯섦)이 적극적인 행동(예컨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으로 이어진다면 그 감정은 더 이상 개인의 영역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혐오가 아니라 두려움이다’라는 말은 정당할까요. 천관율 기자가 위 글을 통해 풀고자 한 물음입니다.


‘감정의 정치학’이란 영역에 관심이 가셨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의미에서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를 여러분의 독서 목록에 넣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그의 존재를 부정당하지 않고, 온전한 시민권(성원권)을 얻는 ‘환대’의 발생과 철회에 대해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임을 사회적 성원권으로 정의하고, 사회를 물리적인 동시에 상징적인 장소로 이해하는 것은 오염의 메타포를 분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왜 어떤 범주의 사람들―흑인, 재일조선인, 불가촉천민 등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럽다고 여겨지는가?” (7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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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은 무엇인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는 혐오와 차별의 흐름을 뒤바꿔야 하는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재임 4년을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형식적이긴 했지만) 국정·정책 과제로 올라 있었던 차별금지법 제정이 문재인 정부에서는 완전히 삭제되었다.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외침에 대해 문 대통령 후보 측의 답은 “나중에”였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는 ‘나중을 기약해보자’는 바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거라는 민감한 시기를 지나 안정적으로 집권하고 나면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나중’은 아직까지도 찾아오지 않았다. 차별금지법의 부재가 문제가 아니다. 차별금지 ‘정책’은 현행법 체제하에서도 정부 정책으로 얼마든지 추진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시도라도 해본 것이 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 홍성수, “차별금지법 제정, 이제 정치와 입법의 몫”, <시사IN>

이번 글은 차별금지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차별금지법의 의의와 내용, 팩트체크, 혐오와 표현의 자유 등의 주제로, 홍성수 교수가 시사인에 ‘굿바이 차별’이라는 제목 하에 연재한 글들입니다. 홍성수 교수의 블로그에 연재 기사 목록이 있어 링크 걸어보겠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각종 ‘진보 의제’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스탠스를 볼 때면 무슨 근거로 스스로를 진보 정당이라고 하는지 조금 의아하기도 합니다. 진보의 ‘포즈’만 있을 뿐. 독재와 민주의 이분법 하에서 ‘민주’인 것은 맞으나 ‘진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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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한 이유

오전 9시,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의원실 전화가 울린다. 오늘은 한 시간 동안 거의 스무 통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의원실의 보좌진은 나를 포함해 총 9명. 9명 모두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를 끊기 무섭게 다시 벨이 울린다. 오전 시간에만 수백 통의 전화가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다. 사실 전화를 여러 통 받는 게 정신적 소모는 덜하다. “안녕하세요, ○○시에 사는 20대 청년입니다. 차별금지법 반대합니다.” 이 정도로 간단하게 끝나는 전화는 오히려 반갑다. 길게는 40분씩 이어지는 통화도 자주 있다. 사실 ‘통화’라기보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이야기를 견뎌내는 거다. 나라를 망치는 법이다, 표현의 자유 침해다, 역차별이다, 더러운 동성애자들, 어떻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를 좋아할 수 있냐, 좌파 독재를 합법화하려는 거다, 사람 성별이 남녀 말고 더 있다는 게 말이 되냐…. 의원실 동료들끼리 ‘30분 넘는 전화 받고 나면 영양제 하나씩 먹기’라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 장태린 "차별금지법, 장혜영 의원실의 뜨거웠던 여름", <한겨레21>

지난 십 여 년 간 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몇 차례 발의되고 철회되는 과정을 되짚으며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거대 양당의 의원들은 어째서 이토록 요지부동인가. 거대 양당의 관심 부족 때문일까? 발의안에 이름을 올린 의원들이 느끼는 정치적 압박이 심하다던데, 그 압박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가? 장태린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 비서가 쓴 글 속에서는 그 정치적 압박을 돌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와 같은 구체성으로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엿보는 것 같기도 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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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이후: 나의 말과 누군가의 세계(1)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에 대해 지나친 검열 아니냐며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장혜영 의원은 “어떤 말을 세상에서 없애버리자는 것이 아니다”라며 “누군가는 문제없다고 여기는 말을 누군가는 어떤 경험을 계기로 더는 쓰지 않게 됐다는 이야기를 한번 보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 박현정, “부모님이라는 말은 쓰지 않겠습니다”, <한겨레21>

은밀한 차별의 언어를 법으로 규제할 순 없을 텐데요. 결국 우리의 말과 글에서 낡은 고정관념과 혐오를 씻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죠. 우리의 말이 누군가의 존재와 세계를 침범하는 일은 없었나,  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한 정의당 장혜원 의원이 작가들과 함께 페이스북에 런칭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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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이후: 나의  말과 누군가의 세계(2)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어에 예민하고자 노력하지만, 무심코 쓴 표현이 부끄러웠던 경험은 내게도 있다.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주장을 펼치는 내 글에 ‘전장’(戰場), ‘전선’(戰線) 같은 군사 용어가 종종 등장한다는 점을 나는 최근에야 의식했다. 병역거부운동을 통해 군사주의에 반대하고 ‘평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시민단체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을 접하면서부터다. 전쟁의 심상을 손쉽게 소환하는 일에 신경 쓰게 되자, ‘핵노잼’, ‘핵꿀잼’ 같은 유행어들도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돌아보자는 캠페인도 단지 ‘올바른’ 단어를 발음하고, 그럴 수 없다면 입 다물라는 계몽과 경찰의 기획이 아니다. 획일적인 표현과 관성적인 인식을 반복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경험과 규범의 한계를 초월하는 언어의 비옥한 가능성을 더 풍성하게 누리자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세계와 더 입체적으로 관계 맺고, 더 복잡하게 연루되자는 제안이다. 수전 손택이 ‘암과 싸우다’ 따위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거부함으로써 알려준 것은, 질병이 ‘싸워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질병’일 뿐이라는 투명한 진실과 그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질 ‘더 자유로운 삶’이다.

- 오혜진, “불완전한 언어와 투명한 진실”, <씨네21>

대학생활을 하며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한 언어 사용에 대해 ‘피로감을 느낀다’, ‘표현을 억압한다’는 얘기를 심심치 않게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이해 안되면 외워’라는 비아냥은 하나의 밈(meme)이 됐죠. 외우지 말고, 함께 공통의 기반을 찾아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오혜진 문학평론가의 글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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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는 글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성소수자의 곁에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겠죠. 그 중엔 대중 문화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녀시대 멤버 티파니 영. ‘사랑과 친절이 항상 이긴다는 걸 보여준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란 그의 말이 오래 마음에 남을 듯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ZDopi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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