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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넛 Sep 06. 2024

사진 한 장을 소환한 날

다시 볼 수 없는 사진, 그 사진은 아직 기억에서 선명했다.




<오늘은 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금줄처럼 쳐놓은 집,

산 중턱에 있는 듯 보였던 그 집엔

상호가 없어서 더욱 묘한 기분이 들었던 사진이다.


십 년도 더 된 기억 속 그 사진은

<달그림자>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던 블로거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이다.

사진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달랑 사진 한 장이 올라왔었는데 심장이 덜컹 소리 내는 듯

맥박의 진동이 컸었다.


그 블로거가 어떤 연유로 그런 사진을 올렸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때 많이 놀랐다.



그 이후로 가끔 쉬는 식당이나 카페와 같은 

서비스를 베이스로 하는 장소들이 사용하는 

휴일 안내 팻말을 유심히 보았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문구는 

< 정기 휴일>이었고 

더러는 그 문구 아래에 

요일도 명확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다 그런 사진을 보고 놀랐던 일조차 잊고 살았는데

그 기억은 선명하게 보존되었음을 오늘 알았다.




오늘 자주 다니던 반찬가게엘 들렸는데, 

문에 A4용지에다 

자필로 <오늘만 쉽니다>라는 안내가 붙어있었다.

그 안내문이 기억을 깨우는 성냥개비였는지,

잊고 살았던 사진이 아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이분 증오>가 끔찍한 것은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거기에 휘말려 들기 때문에 끔찍한 것이다. 

일단 휘말려 들면 

삼십 초도 안 되어 어떤 억제도 소용없게 된다. 

공포와 복수심에의 무서운 도취, 

큼직한 쇠망치로 때리고, 

고문하고, 

얼굴을 깨부수어 죽이고 싶은 욕망이 

전류처럼 모든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서 

뜻하지 않은 사람조차 

오만상을 찌브린 채 비명을 지르는 

광적인 상태에 빠져 버린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느끼는 분노는 

램프의 불꽃처럼 대상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꿀 수 있는, 

추상적이면서 방향감각도 없는 감정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발췌




허탕을 치고 되돌아오는 길에 

혹시 <사장님에게 무슨 일이 있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렇게 붙여 놓은 안내는 

과연 친절한 것인가로 생각이 이동했다. 

사실, 나는 내가 직접 만들어 먹는 유형이라 

반찬가게를 자주 이용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끔 <무엇을 해 먹을까 > 고민하다가 

아이디어가 딸리면 반찬가게로 가서 

눈길이 제일 오래 머무는 반찬을 집어온다. 



그래서 자주 가는 단골이 아닌 가끔 가는 단골? 

그렇지만 문이 닫혀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곳이다. 

자주 방문하지 않아서였는지,

믿고 사서 먹을 수 있는 

작은 반찬가게의 사장님 얼굴을 떠올리려 했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이중사고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것,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며낸 거짓말을 하는 것, 

상반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 다 똑같은 과정을 적용하는 것......”


조지 오웰의 1984에서 발췌



<오늘은 쉽니다> 혹은 <오늘만 쉽니다>와 같은 문장은 

소비자 혹은 단골에게 보인 친절한 행동이었을 텐데, 

친절이 아닌 걱정과 불안을 안겨주는 

문구로 둔갑할 수도 있는 문장이라는 

오래된 기억을 상기했다. 

빈손으로 들어오면 냉동고를 뒤져야 할 판이라 

마트로 급히 발길을 돌렸다. 

금요일 오후라 이마트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혼자 장을 보는 사람보다 가족과 장을 보는 사람이 더 많다. 




나는 나도 모르게 트롤리를 밀고 들어갔다.

아차 싶었다. 

먹거리를 사러 갈 때는 

밥을 먹은 후에 가야 꼭 사야 할 것만 사는데 

먹기 전에 갔으므로 닥치는 대로 살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우려는 결국 맞았다.

계획에 없던 재료들이 이미 내 손안에, 

집으로 들어오는 양손이 무거웠고, 

가득 찬 냉동실에 또 꾹꾹 밀어 넣었다.


반찬가게에 붙어있는 <오늘만 쉽니다>라는 문구가 

나를 마트로 가게 했고,

나는 왠지 요리책에서 볼 수 있는 맛있는 요리,

그런 요리를 

내 손으로 해낼 것이라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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