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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넛 Sep 16. 2024

소꿉놀이

일상이 아닐 땐 단순노동도 놀이처럼 즐거움이다.


주부인 듯 주부가 아닌 생활이 

따져보니, 십 년 하고도 사 년이 되었다. 


어떤 역할이든지 해 보지 못한 역할이라면 

그 역할에 대한 기대나 상상 혹은 꿈으로 끝났을 텐데, 

해봤던 역할이라 꿈이 아닌 현실에서 문득문득, 

아주 자연스럽게

주부다운 행동으로 드러난다. 

오늘의 일상에 끼어든 돌발적인 행동들도 

역시 그런 종류의 행동 중 하나다. 


물론 오늘 갑자기 끼어든 게 아니라 

어제부터 누적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어제 마트에서 간편하게 익혀서 먹거나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는 <완성형> 제품이 아닌 

채소 몇 가지를 사 들고 왔으므로 오늘, 이런 행동으로 이어졌다.



일단 채소에 관심을 기울인 것, 

관심에서 멈추지 않고 사서 집으로 가져왔으므로 

싱싱할 때 보관 방법을 취해야 했다. 


배추는 김치로 환생했고, 

무는 <일전에 지인에게서 받았던

 –샤프란-을 차로 우려 마시기엔 차 종류가 많아서 그대로 방치되었던>

식초와 설탕과 <샤프란>에 담갔다.

처음 해 본 깍두기 응용 버전? 

맛이 어떨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빛깔은 예쁘다. 


분주하게 부엌일을 해 놓고 난 후, 

혼자 살면서 왜, 굳이, 또,라는 연속적인 자문이 이어졌다.




”만성적인 죄책감은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이다. 

혹시 무슨 나쁜 행위를 저질렀다면, 

잘못을 뉘우치며 능력껏 그것을 시정하고, 

다음에는 더 잘하도록 스스로 다짐해야 옳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잘못에 두고두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오물 속에서 뒹구는 것이, 

몸을 깨끗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발췌



혼자 살기 시작했던 초창기에 

남편에게 화가 난 친구가 

남편을 불안에 떨게 할 목적으로 집을 나와 

행선지를 남편에게 숨긴 채로 

나와 함께 2주를 지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와 함께 전통시장 구경을 갔다가 싱싱한 쪽파가 2단에 5천 원이었나?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아무튼 너무 많은 양의 쪽파를 사 와서 

둘이 늦은 밥까지 쪽파를 다듬고 

파김치를 만든 후 둘 다 파김치가 되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파김치를 해 놓고도 처치가 곤란했었던? 

참고로 나는 파김치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싱싱한 채소를 혼자 감당하기 어려울 땐 

저장 방법을 고민해서 채소를 버리지 않으려는 

가상한 주부의 마음이 내 안에 남아있었다. 

부엌일이 일상이었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행동이 

소꿉놀이로 느껴지는 이유도 

간헐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일 듯하다. 

돌발적으로 했던 행동이었지만 재밌고 뿌듯했다. 

누군가에게 맛을 봐 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만큼? 



”비록 빗물이 아무리 단단한 화강암을 뚫는다고는 하지만, 

꼭 물방울이라고 하기는 어렵겠고,

그보다는 밀봉용 액체성 밀랍 방울이랄까? 

어떤 물체 위에 떨어지면 거기에 달라붙어 

표면을 덮고는 

결국은 모두가 주홍빛 바위만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방울들. 


<중략> 


그러다가 마침내 아이의 마음은 이런 암시들과 하나가 되고, 

암시의 총체는 아이의 이성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어른의 이성도 역시 줄곧 이런 암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이런 모든 암시는 우리를 지배하는 암시다. “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발췌



차례음식을 만드느라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지만, 

저장음식을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 날이다. 

단순 노동을 하는 동안엔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판단이 서지 않지만, 

잠시 연휴, 추석, 이런 단어들이 사라졌었다.


하루가 어느 사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약간은 억울한 기분도 있지만,

결과물들이 냉장고에서 한 동안 든든하게

그 자리에서 익어갈 테니,

뿌듯함이 더 크다.


맛은 보장하지 못하지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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