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à La Garde]
[영화 |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à La Garde (영어권 타이틀, Custody 양육권)]
아버지는 늘 나를 통해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너희 아빠’라고 불렀다. 내가 어느 정도의 사리 분별을 하게 된 이후로 두 사람과 함께 명절 친척 집에 가거나 함께 외식하는 일, 하물며 같은 차를 탔던 기억조차 없다. 어머니는 일이 바빴고 아버지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은 헤어졌다. 왜 진작 헤어지지 않았을까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두 사람을 따로따로, 아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좋은 어머니, 좋은 아버지였지만 좋은 부부는 아니었던 거로. 두 사람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예전의 나는 그 기억 속에 잘 두기로 했다.
이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Jusqu'à La Garde>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시사회장에 도착했다. 영화 티켓을 받고 자리에 앉아 영화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영화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했다. 가정법원에서의 지난하고도 명쾌하지 않은 대화로 시작한 영화가 총알에 구멍이 숭숭난 허술한 현관문이 닫히는 장면으로 끝날 때까지, 나는 제목도 잘 모르고 보기 시작한 이 영화에서 잊고 지낸 어렸던 그때의 나를 순간순간 만날 수 있었다. 정말 무섭고 무서운 영화였다.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관람한 영화의 리뷰입니다.
*영화 결말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리암(레아 드루케)은 남편 앙투안(드니 메노셰)의 폭력성을 견디지 못해 올해로 성인이 된 큰딸 조세핀(마틸드 오느뵈)과 11살 아들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을 데리고 집에서 나왔다. 문제는 앙투안이 ‘양육권’을 들먹이며 아이들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것. 이를 조정하기 위해 두 사람은 가정법원을 들락날락하고 있다.
조세핀의 진료 기록, 줄리앙의 진술서를 통해 아이들에게 '그 사람'이라 불리는 아버지 앙투안의 폭력성과 그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들의 의견이 피력되었지만, 판사는 결국 앙투안의 손을 들어준다. 성인인 큰딸은 본인의 선택으로 ‘그 사람’을 보지 않을 수 있지만, 미성년자인 줄리앙에게는 격주 주말을 앙투안과 보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흔하디흔한 불안한 가정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긴장감과 약간의 가족애, 그리고 포스터 속 주인공인 소년 줄리앙의 성장담이 녹아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아이가 아버지의 차에 타면서부터, 안전벨트 경고음이 불안하게 울려대면서부터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육중한 체구의 아버지는 운전대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왜소한 아이를 끊임없이 추궁한다. 엄마는 어디에 있는지, 왜 엄마는 자신의 연락을 무시하는 건지, 지금 사는 곳은 어딘지, 왜 너는 나를 '그 사람'이라고 말한 건지… 법정에서 호소한 것 같은 아이를 사랑한다는 느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만, 내가 지금 이렇게, 이만큼이나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
두 번째 만남에서 아버지는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을 봤다는 친척의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무작정 그 동네로 데려가 집을 알려달라고 윽박지른다. 겁에 질려있지만 진짜 집을 알려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엉뚱한 집을 알려준 뒤 아이는 도망을 친다. 그런 아이를 뒤쫓다가 이내 멈춰서서 차로 돌아간 아버지. 토끼 사냥을 즐기는 아버지는 마치 사냥꾼이 토끼를 몰아가다 풀어줄 듯 하며 아이를 다시 차에 태운다.
결국 도착한 아이의 집. 아버지는 집안 곳곳을 뒤진다. 부인이 자신을 떠난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부인에게 생긴 새 남자 때문이라는 의심 때문이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남편 앞에서 마치 밀랍인형처럼 굳은 아내. 딸의 생일파티에 나가야 한다는 말만 나지막이 뱉은 채, "나는 변했다. 예전의 내가 아니다"라며 흐느끼며 자신을 안는 남편의 등을 기계적으로 토닥인다.
사건은 그날 밤에 벌어진다. 생일파티장까지 찾아가 밖에서 난동을 피우던 아버지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아내의 태도에, 그리고 마치 아내의 새 남자인 듯 그 주변을 서성이는 남자 때문에 화를 못 참고 결국 아내와 아이들이 사는 집으로 찾아간다. 처음에는 그냥 문을 두드리다가, 나중에는 문을 발로 차다가, 결국에는 토끼 사냥을 할 때 쓰는 장총으로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가 총을 쏘아대며 아내를 찾는다.
아내는 아이와 함께 욕실로 도망친 채 경찰에 전화를 건다. 조금씩 가까워져 오는 총소리와 발소리에 한참을 숨죽인 채 울다가 욕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고 총을 겨눈 남편을 경찰이 제압하면서 상황은 종료된다. 그리고 이내 영화도 마무리된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아이에게 거짓말을 시킨다. 아이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시키는 대로, 그 이상으로 거짓말을 한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아이를 몰아세운다. 자기 자식을 향한 사랑보다는 아내에 대한 집착을 해소할 수 있는 연결고리처럼 아이를 대한다. 아이에게 선택권은 없다.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라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탁구공처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 바랄 뿐이다.
무서운 영화였다. 어린아이에게는 절대적인 세상인 부모라는 존재 앞에서 어떠한 의지도 없이 그들에 의해 세상에 초대된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상황들이 무척이나 힘든 그런 영화였다. ‘매드맥스’처럼 쉼 없이 이어지는 액션에서 나오는 아드레날린이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과분비 되는 영화였다.
그런데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아이에게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장면 한 장면 정말 숨죽이고 화면만 보았다. 결국 사고는 났고 다행히 경찰의 도움으로 살아났지만, 그 아이에게 남은 상처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저마다 주어진 미션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화목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큰 탈 없이 자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환경도 그렇지 않은 환경도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퀘스트같은 것이리라고 말이다. 쉽지 않은 환경이라서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더 넓고 깊어질 수 있고 저마다의 어려움을 갖고 우리는 모두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한참이 지나서, 부모가 될 나이가 되어서야 나는 나의 부모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그때 아버지가 그랬던 이유를, 어머니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새롭게 알게 되고 또 듣게 된다. 덕분에 나는 녹록지 않았던 예전의 나를 조금은 더 따뜻하게 보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밖 어딘가에 있을 줄리앙도 그런 마음을 가져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줄리앙의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이가 알아주었으면.
만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