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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Jul 01. 2017

혼란 속에 머물기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열무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전화기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열무는 전화기를 향해 짖지 않는다. 곧장 현관으로 달려가 꼬리를 흔들며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고, 열무는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 털레털레 돌아와 내 옆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누워버린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열무의 뒷모습은 애처롭다. 

    열무는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온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나 보다. 전화기가 아니라 밖에 나갔던 엄마가 돌아왔고, 그 목소리는 현관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 모르긴 몰라도 열무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비록 자기 방식이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현관에 엄마가 없는데, 엄마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흘러나오는 걸까, 열무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녀석은 이 혼란을 오래 담아두지 않는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라고 간단히 생각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내 옆에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눕는다. 열무는 내가 컴퓨터를 하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열무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오래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혹은 외면함으로써 혼란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혼란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혼란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뭐 이런 식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루마니아의 민속학자인 콘스탄틴 부라일로이우는 마라무레쉬라는 마을에서 아름다운 민요 하나를 채집할 수 있었다. 산의 요정이 젊은 남자에게 홀렸는데, 그 남자의 결혼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질투심에 불탄 요정이 남자를 바위 꼭대기에서 아래로 떠밀어버린다. 그 다음날, 목동들이 남자의 시신과 함께 나무에 걸려 있는 모자를 찾아낸다. 목동들이 시신을 마을로 가져오자 남자의 약혼녀가 보러 온다. 약혼자의 목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장송곡 하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랫말은 신화적인 암시들로 가득한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제례용 가사이다(엘리아데, <<영원회귀의 신화>>, 57면).     


    이것은 마라무레쉬 마을의 아름다운 민요에 관한 이야기다. 결혼식을 앞둔 남자가 있었다, 그가 산에 올라갔다, 그랬다가 그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여기까지는 사실이다. 하지만 요정이 젊은 남자에게 홀렸다거나 그래서 요정이 젊은 남자를 죽였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다. 젊은 남자가 죽을 때는 옆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시신은 사고가 있었던 그 다음날이 아닌 바로 그날 찾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젊은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모르는 빈 칸을 채우기 위해 누군가 ‘이야기’를 지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민속학자 부라일로이우도 이렇게 생각했을려나? 여하튼 그는 이 민요의 유래가 무척 궁금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요라고 말했다. 부라일로이우는 집요하게 탐문한 결과 이 민요에 등장하는 젊은 청년과 실제로 약혼했던 여성을 만나게 된다.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오래된 민요라더니 어떻게 약혼했던 여성을 만날 수 있었던 거지?(엘리아데, <<영원회귀의 신화>>, 57면).     


    이 민요는 사실 아주 평범한 비극이었다. 그녀의 약혼자가 어느 날 저녁 부주의로 절벽에서 미끄러진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았다. 비명 소리를 들은 산사람들이 그를 마을로 데려오고, 그 얼마 뒤에 그는 목숨을 거둔다. 장례식에서 남자의 약혼녀는 마을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평범한 장송곡을 되풀이해서 불렀지만, 그 노래에 산의 요정에 대한 언급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요정 같은 건 없었다. 젊은 남자는 산에 올라갔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고 며칠을 앓다 죽었다. 마라무레쉬 마을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에 대해 엘리아데는 “신화적인 범주 안으로 통합”시키려는 노력 혹은 “원형적인 범주 안에 통합시키려는 절차”를 통해 결혼 전에 죽은 젊은이를 어떻게든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젊은 남자에게 찾아온 불운을, 그것도 결혼을 앞둔 이에게 찾아온 불운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우연처럼 찾아오는 사고의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민요와 그 내력담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어쩌면 혼란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 혼란을 정리하거나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혼란 속에 오래 머물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사람이니까.

어휴~ 사진 좀 그만 찍어요. 지금은 렌즈를 처다볼 기운도 없단 말예요.

*이 글은 <경북매일>에 올린 것을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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