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관한 말들을 모아봤어요. 이건 완성이 아니라 볼 때마다 계속 작성하려구요. 제가 모르는 정의를 알고 계신다면 답글 좀 남겨주세요^^
공자, <양화편> 중
자왈 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를 배우면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사물을 잘 볼 수 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고, 사리에 어긋나지 않게 원망할 수 있다.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다.
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논어 양화편>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중
시인은 숙련된 킬러처럼 언어를 포착하고 그것을 끝내 살해하는 존재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중
1. 시는 가장 개인적인 언어로 가장 심층적인 세계를 가장 무책임하게 주파하는 장르
2. 시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려할 때 시는 실패한다.
이것을 헤겔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일단 헤겔 이후의 세계에 들어서면 반복 개념은 ‘다시 정상화되고’ 전복적 예리함을 잃게 된다. 이 관계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피날레와 모차르트 이후의 낭만주의의 관계와 비슷하다. 즉 돈 조반니가 죽는 장면은 모차르트의 세계의 좌표들을 교란하는 무시무시한 초과를 낳는다. 하지만 비록 이 초과가 낭만주의 쪽을 향해 가리키지만 본래적인 의미의 낭만주의에 이르면 전복적 예리함을 잃고 ‘다시 정상화된다.’(<헤겔 레스토랑>, 894면)
신영복, <담론> 중
기승전결이라는 시의 전개구조가 그렇습니다. 먼저 시상을 일으킵니다. 기라고 합니다. 다음 그 상황이 일정하게 지속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승입니다. 이러한 양적 축적의 일정한 단계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적 변화입니다. 그것을 전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지금까지의 과정이 총화된 다시 말하자면 기 승 전의 최종적 완성형으로서의 결로 마무리되는 구조입니다. 기승전결은 사물의 변화나 사태의 진전을 전형화한 전개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란 그런 점에서 '변화의 틀'익도 합니다. 사물과 사물의 집합 그리고 집합의 시간적 변화라는 동태적 과정을 담는 틀이며 리듬이기도 합니다(35~36면).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그러나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되고, 이 말은 곧 온몸으로 바로 온 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 된다. 그런데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이러한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게 되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 게 된다.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중
아도르노의 유명한 말에는 수정을 가해야 할 것 같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불가능해진 것은 시가 아니라 산문이다. 시를 통해서는 수용서의 견딜 수 없는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환기할 수 있으나, 사실주의적 산문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시가 불가능하다고 선언할 때, 이 불가능성은 가능한 불가능성이다. 시는 그 정의상 언제나, 직접 말할 수 없는 것, 오직 넌지시 암시될 수만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는 말이 닿지 못하는 곳에 음악이 가 닿을 수 있다는 경구와도 통한다.
…중략…
여기서의 묘사는 윌리스 스티븐스가 ‘장소 없는 묘사’라 칭했던 것으로 예술에 있어 고유한 것이다. 이는 그 묘사의 내용을 역사적 시공간 속에 배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이 묘사하고자 하는 현상의 배경으로서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공간을 창조해내는 묘사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 묘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배후에 있는 현실의 깊이에 의해 지탱되는 외양이 아니라 탈맥락화된 외양, 실재 존재와 완전히 일치하는 외양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스티븐스를 인용하자. “모든 것은 겉으로 보이는 대로이며 그렇게 보이는 대로 존재한다.” 이렇나 예술적 묘사는 “그 묘사의 형식 외부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외부의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제 고유한 내적 형식을 끄집어낸다. 마치 쇤베르크가 음악을 통해 전체주의적 공포가 가진 내적 형식을 ‘끄집어’ 냈듯이 말이다. 그는 이 공포가 주체성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환기시킨 셈이다(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27~29면).
람핑, <서정시: 이론과 역사> 중
그런 의미에서는 나는 시를 ‘시행 발화Versrede’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시행을 통한 발화Rede in Versen’로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38면).
발화라는 개념은 언어적 기호들의 의미 포함적이며 제한된 연속체가 제시해주는 모든 언어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38면).
시행 구성은 어떤 경우에도 율동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휴지의 설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휴지들에서 시행 구성이 다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휴지의 설정은 음운상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동일한 단어들이 시행의 첫머리 혹은 시행의 끝에 위치함을 통해서 강조될 수도 있으며, 그러한 두 개의 휴지를 통해서 형성된 시행은 다시금 그 자체내에서 운율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다. 시행은 첫머리나 끝에의 음운상 최소한 부분적으로 동일한 단어들의 배치와 시행의 운율적 규제는 매 시행 구성의 율동적 상부 구조화의 두 개의 기본적 가능성들로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람핑, 서정시, 이론과 역사, 장영태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4, 47면).
[발화의 특징으로는 언어성(언어적 기호 사용), 의미 내포성(의미론적 기능을 지녀야 함), 연속성(순서에 맞게 배열되어야 함), 유한성(확실한 시작과 확실한 종결을 가져야 함)]
[람핑은 시에서 중요한 것은 운율이 아니라 행으로 나눠질 때 생기는 ‘휴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각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시가 꼭 ‘발화’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