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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Jun 22. 2017

찔레꽃 향기는 슬퍼요




찔레꽃과 장미꽃이 함께 피었다. 생물학적으로 둘 다 ‘장미과’에 속한다. 찔레의 잎이나 줄기는 장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더 많이 좋아하는 꽃은 장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예쁘고 찔레꽃은 찔레꽃대로 예쁘다. 어떤 것이 더 예쁘거나 좋다고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기준은 없다. 저 꽃들은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존재란 가치판단이나 평가를 떠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 동시에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들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사명이다.



    장사익하면 딱 떠오르는 노래, 그건 뭐니 뭐니 해도 〈찔레꽃〉이 아닐까? 그 노랫말은 이렇다.

     

하얀 꽃 찔레꽃 / 순박한 꽃 찔레꽃 / 별처럼 슬픈 찔레꽃 /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 너무 슬퍼요 / 그래서 울었지 / 밤새워 울었지
     
(반복)
     
아!
찔레꽃처럼 울었지 / 찔레꽃처럼 노래했지 / 찔레꽃처럼 춤췄지
찔레꽃처럼 사랑했지 / 찔레꽃처럼 살았지 / 찔레꽃처럼 울었지
당신은 찔레꽃 / 찔레꽃처럼 울었지

     

    가사는 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다. 찔레꽃은 하얗고, 순박하고,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럽고, 그래서 목 놓아, 밤새워 울었다는 것. 이것이 전부다. 찔레꽃이 하얗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고, 순박하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은 아니지만 대개의 흰빛을 띄는 것들이 그러하듯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이유는 가사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왜 이런 감정을 느꼈던 것일까? 장사익은 이렇게 말한다.

     

    [이 노래를 지을 때] 잠실 주공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꽃향기가 진하게 나는 거예요. 빨간 장미가 활짝 피었기에 가까이 가봤더니 장미향이 아니에요. 자세히 보니까 저 안에 숨어있는 찔레꽃 향기였어요. 아유, 눈물이 팍 났네, 그냥. 나도 향기가 있는 사람인데 다들 장미만 쳐다보네. 그러니까 찔레꽃 너나 나나 똑같은 신세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한현우의 인간 정독〉, 《조선일보》, 2015.10.25)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찔레꽃과 자신의 처지가 똑같이 느껴졌다고, 그래서 오래도록 울었노라고 장사익은 고백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이런 감정은 어디까지나 장사익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하다. 그런데 말이다, 어떻게 이 노래는 우리의 가슴으로까지 스미는 걸까? 장사익의 사연을 듣지 않고도 찔레꽃을 슬프다고 말하는 저 주관적이고 비약적인 말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이토록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우리 역시 울게 만드는 걸까?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하나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찔레꽃에 대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찔레꽃은 가난과 배고픔을 떠올리게 한다. 찔레꽃은 5월에 핀다. 그 때는 쌀독에 쌀은커녕 보리마저 떨어지는 그야말로 보릿고개다. 나의 어머니는 찔레꽃만 보면 아직도 배고팠을 때 생각이 난다고 한다.

    나는 그런 배고픔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그래도 찔레순이 돋아나올 때면 배가 아프도록 먹어본 적은 있다. 꽃이 피기 전 찔레순은 여리고 부드러워 씹으면 씹는 맛이 난다. 또한 풋내와 함께 쌉쌀한 맛이 기분 좋게 입안을 채운다. 나야 주전부리대신 먹었지만, 정말 끼니로 생각하고 먹은 세대에게 찔레는 아리게 다가올 것이다. 〈찔레꽃〉은 이런 공통경험 혹은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며, 무엇보다 장사익의 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사익의 어둡고 걸걸한 목소리가 느린 리듬을 타고 찔레꽃을 노래할 때, 그 술어를 듣지 않고도 ‘울음’으로 연결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찔레꽃은 슬프다’라는 일종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다고 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어떤 논리적인 말보다도 명백한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이 노래는 노래를 듣는 사람들을 끌고 슬픔의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유연히 헤엄친다. 슬플 때는 오히려 슬픈 노래가 위안이 되는 법.

    장사익의 노래는 논리적 구조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논리정연한 말이나 글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의 노래는 그야말로 비약적이다.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노래는 날아오르듯 솟구쳐 내면 깊숙한 곳으로 곧바로 내리꽂힌다. 모든 노래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노래들도 있다. 그런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언젠가 장사익은 손석희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시선집중》에 출연한 적이 있다(2010.9.25.). 손석희가 가수지망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냐는 취지의 질문에 장사익은 “노래라는 것은 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을 제가 사는 것처럼 그건 알아서 터득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노래에는 길이 없고, 그 길은 자신이 만들어내야 한다. 장사익의 노래는 가요도 그렇다고 국악도 아닌 정체불명의 노래다. 장사익은 전례가 없는 자신만의 노래로 새로운 노래의 길을 만들고 있다. 훌륭한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 글은 <<경북매일>>신문에 발표했던 것을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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