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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Mar 07. 2017

눈 오는 날은 짐승이고 싶어라
-유년의 겨울, 셋

-바람의 경치3

하나, 눈 오는 날은 짐승이고 싶어라

경상남도 거창군 신풍령에서 바라본 겨울산:저 모퉁이 마다 마을이 있고, 마을마다 사람들이 산다.

    나는 산골에서 자랐다. 우리 동네는 해발이 600m가 넘는다. 동네 우측으로는 삼봉산(1254m)이 있고, 좌측으로는 갈미봉(1210m)이 있고 정면으로는 신풍령(910m)이 있어서 구름이 모여 들기만 하면 어느 곳으로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렇게 구름이 몰려드는 날, 아침은 습기에 젖고, 동네 사람들의 몸도 젖어 누구하나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나는 아침이 오는지도 모른 채 늦잠을 잤다.  

    눈은 한 번 오기만 하면 쉴 새 없이 쏟아져, 버스는 그 눈 속에서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렇게 눈 오는 아침은 몸이 먼저 알아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두껍고 게으른 솜이불에 눌려 일어날 수가 없었노라고 내가 내게 핑계를 대었다. 그러는 사이 나무에는 희고 두터운 눈이 쌓여 쩍쩍 가지 벌어지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와 함께 천재지변으로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이장님의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눈은 그렇게 오기만 올 것이었다. 나머지는 눈의 몫이 아니었다. "눈이 푹푹 나리는 날", 이 산골의 눈 속에서 농부들은 농부일 리 없었고 아이들도 아이일 리 없었다. 아이들도 감히 눈썰매를 탈 엄두를 못냈고, 바쁘기만 한 어른들도 일손을 놓았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까닭에 '나타샤'가 올리는 만무했다. 이제 누구나 할 것 없이 군불을 활활 지피고, 등을 지지면 그만이었다. 사람들은 온종일 짐승처럼 웅크렸다가 다음 날 눈이 그칠 때쯤 일어날 것이었다. 눈이 그치면 사람들은 그제야 눈 쌓인 길을 치우리라. 아무도 올 리 없는 길이었으나, 김훈의 말처럼 길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것이기에 언제나 마을에서 마을로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동네 사람들은 눈 덮인 길을 쓸며, 짐승이었던 흔적 역시 쓸어낼 것이었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무척 신기했던 것은 눈 오는 날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비도 아니고 눈을 맞기 싫어 우산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눈 그런 것과 아랑곳없이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낯설었다. 여전히 나는, 눈 오는 날이면 되도록 등을 지지는 짐승이고 싶다.    


둘, 군불과 풍구와 눈물

    불아궁이는 늘 땅바닥보다 낮은 곳에 있어 해가 지기도 전에 어둑신해졌다. 굵은 장작은 마치 양파껍질처럼 한 겹씩 타들어갔고 불길은 불아궁이 깊은 곳까지 길을 내었지만, 더 먼 곳까지 닿을 수 없었다. 그 닿을 수 없는 곳을 윗목이라 불렀다. 방바닥은 평평했는데도 윗목이 있었고 아랫목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웃어른이었지만 아랫목에 계셨다.

 부엌에 있는 솥에선 물을 끓였고, 바깥에 있는 솥에선 쇠여물을 끓였다.  / 출처:http://jeonlado.com/v3/print_paper.php?number=9167

       

    위와 아래만큼이나 구분이 어려웠던 건 앞집과 뒷집이었다. 어머니가 말하는 앞집이란 동네 입구를 기준으로 했지만, 나는 동네 입구를 나갈 일이 없었고 동네 뒷산을 누볐기에 나에게 동네 입구는 뒷산이었다. 나는 커서도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이 늘 서툴렀다. 사람들이 길을 물을 때면 아는 길조차 머뭇거리며,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의 역사는 이토록 길다. 

    어머니가 뒷집에 심부름을 보내면, 나는 앞집 밀양 할매네(밀양에서 시집을 오셔서 밀양 할매로 불렸다)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뒤늦게 돌아와 군불을 넣는 할아버지 옆에서 불을 쬐었다. 할아버지는 풍구를 돌려 불을 붙였다. 불이 잘 붙는 날은 불이 활활 타올라 아궁이 바깥으로도 불길이 뻗어 나왔다. 불이 잘 타지 않는 날은 아궁이는 연기를 내뿜었다. 불이든 연기든 한 한결같이 ‘내다’라는 말을 썼다. 불이 내고 연기가 냈다. 연기가 낼 땐 매워 눈물을 흘렸다.

 

풍구: 불이 내는 날이 있고 연기가 내는 날이 있다. 연기가 낼 땐 풍구를 사용했다. / 출처: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

    말들이 사라지면 기억의 자리까지 희미해진다. 아궁이 앞에서 벌겋게 익어가던 내가, 벌건 장작을 뒤적거릴 때 쓰던 불쏘시개며, 불아궁이로 기어 나온 낸 연기를 향해 힘차게 돌아가던 풍구며, 그런 단어들과 더불어 기억들은 아스라해진다. 그 아련함 속에서 유년의 아랫목은 여전히 따사롭다.    


셋, 집덫골

    우리 동네 뒷산은 지도에 있긴 하지만 이름은 없다. 이름이 없어도 이 산은 1000m가 넘는다. 아버지는 이곳을 ‘집덫골 날망’이라 했다. 집덕골인지, 짚덕골인지, 짙덮골인지 알 길이 없다. 아버지 역시 [집덧골]이라는 것을 말로 배웠으니 그 정확한 표기를 알 리 없다. 결국 누구도 그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지명은 한글보다 먼저 태어나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이 말은 다른 낡은 것들과 함께 스러져 갈 것이다.

 

집덫골에서 바라본 우리 동네:  잔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제멋대로 자란 가지들 사이로 일곱 집 우리 동네가 아련하게 있다.

    사실이야 어찌되었던 나는 이 골짜기에 홀로 다녀온 후 ‘집덫골’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골짜기에서 나는, 집채만 한 호랑이를 생각하며 무서웠고, 동시에 집채만큼 큰 덫을 생각하며 안심했다. 

잔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나, 제멋대로 자란 가지들 사이로 일곱 집 우리 동네가 아련하게 있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마을에, 남겨진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언젠가 우리 동네도 이름 없을 것을 생각하니 슬프다.


*이 글은 <<경북매일>>신문에 발표했던 것을 수정한 것이다.




커버사진: 눈 오는 날 창덕궁,

*우리 동네가 아니어서 아쉽긴 하지만 눈은 이렇게 와야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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