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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Mar 05. 2017

베네치아의 골목길, 오래도록 서성이고 있는

-바람의 경치2

리기산과 밀라노 대성당

    참 운이 좋았어요. 유럽여행은 처음이었는데 여행하는 내내 날씨가 좋았거든요. 비는커녕 구름조차 낀 적이 없었어요. 가장 경이로웠던 곳이 리기산이었다면, 가장 시선을 사로잡았던 곳은 밀라노 대성당이었어요.    

리기산의 중턱: 운해 아래로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운해를 바라보며 나는 명랑한 물고기처럼 리기산을 헤엄쳐 다녔다.

    천왕봉은 리기산보다 200m 정도 높지만, 리기산이 훨씬 더 웅장하게 느껴졌어요. 그도 그럴 것이 천왕봉은 소백산맥에서 최고 높은 봉오리지만, 리기산은 해발 4000미터가 넘는 산들을 끼고 있는 알프스 산맥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지리산에서는 천왕봉을 제외한 다른 산들이 시시하게 느껴졌어요. 하지만 리기산은 더 높은 산들에 감싸 안겨 있었고, 멀고도 더 높은 산들 앞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리기산 정상: 청명한 하늘 아래로 수많은 산과 산의 줄기들이 리기산을 둥글게 감싸 안고 있었다.

    두오모는 영어로는 돔(dome)이라는 뜻인데, 반구형의 둥근 지붕을 의미한다고 해요. 그런데 밀라노 대성당은 돔 대신 찌를 듯이 뾰족한 첨탑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두오모라고 부른 답니다. 성당의 거대한 규모와 그 성당 외벽에 장식된 2000여개의 조각상들도 대단했지만, 저를 사로잡은 것은 외관의 색감이었어요.

밀라노의 두오모: 인상파의 그림처럼 대리석은 희스무레하고 거무스레한 유화물감으로 얼룩덜룩하다.

    1860년 경 이곳을 방문했던 미국작가는 “입김만 불면 사라져 버릴 서리꽃 같은 환상!”(마크 트웨인, 『순진한 이의 해외여행』)이라고 말했다고 해요. 대성당을 이루고 있는 백색 대리석은 저마다 명도가 달랐어요. 말이 백색 대리석이지 그것들은 희지도 검지도 않았어요. 희스무레하고 거무스레한 것들이 마치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짜 맞춰져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정말 입김만 불면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베네치아의 미로와도 같은 골목길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리기산도, 밀라노도, 화려한 파리도, 유서 깊은 로마도 아니었어요. 석달이 지난 지금 기억 속을 서성이게 만드는 건 베네치아였어요. 베네치아가 ‘물의 도시’여서도 아니었고, 산마르코 성당, 두칼레 궁전과 같은 화려한 건물 때문도 아니었고, 물을 가로지르는 느긋하면서도 날렵한 곤돌라 때문도 아니었어요.

    사실 전 처음에 베네치아를 보고 많이 실망했었어요. 유럽을 다녀온 친구들로부터 베네치아가 가장 아름다웠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기대를 너무 많이 했었나 봐요. 베네치아는 낡고 쇠락한 느낌이 역력했어요. 건물들의 페인트는 빛이 바래거나 벗겨지고, 물은 썩어가는 듯 악취를 풍겼고, 이 죽어가는 도시 위로 지치거나 지나치게 들뜬 관광객들이 유령처럼 무리지어 헤매고 있었거든요. 도대체 여기의 어디가 아름답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베네치아가 왜 기억에 남았냐구요? 그날 밤에 베네치아에 한 번 더 다녀왔거든요. 가이드가 베네치아의 야경을 보여준다고 했어요. 낮에 너무 실망해서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여행을 왔는데 잠을 자는 건 너무 사치인 것 같아 따라나섰어요. 물론 전 조금만 둘러보고 맛있는 맥주나 마실 생각이었죠.

우리 숙소는 베네치아가 아니라 그 인근에 있었어요. 저녁을 먹고 메스트레역에서 모여 한 정거장 밖에 되지 않는 베네치아의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했어요. 특이하게도 2층으로 된 기차였는데, 기차라기보다는 지하철 같은 느낌이었지만,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어요. 그렇게 역에 도착해서는 스칼치(Scalzi)다리를 지나 베네치아의 내부로 들어갔어요.

    그때까진 좋았어요. 여행 내내 실수를 연발하던 가이드는 그날도 어김없이 사고를 쳤어요. 가이드가 길을 잃었거든요. 우리는 어딘지도 모르는 미로와도 같은 길에서 난감했어요. 그 난감함은 가이드에 대한 푸념으로 옮아갔고요. 가이드는 30분 정도만 둘러보고 자유 시간을 준다고 약속했지만, 우리는 거의 두 시간을 헤매다 왔던 길을 더듬어 힘겹게 기차역에 도착했어요. 막차 시간까지는 40여분이 남았지만 술집은 문을 닫고 있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차를 기다리다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들

    그런데 베네치아가 뭐가 좋았냐구요? 왜 베네치아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냐구요? 사실 모르겠어요. 그냥 골목길을 헤맸을 뿐인데 그 기억이 떠나가지 않아요. 길을 잃고 불평도 늘어놓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는 느낌예요. 길을 잃은 사건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을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낯익지도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은 골목길, 둥근 가로등의 빛은 둥글게 번졌다.

    베네치아의 가로등은 가스등처럼 은은했어요. 그 빛은 매우 둥글게 느껴졌고, 그 유선형의 빛은 도시의 퇴락까지도 잘 숨겨주었어요. 숨겨진 것들 사이로 길이 모습을 드러냈어요. 집은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러한 집과 집의 사이는 모두 길이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골목 속으로 들어갔어요. 우리는 한국인 코스프레를 하고 이국의 불빛과 이국의 건물 사이사이를 누볐어요. 할로윈 때 사탕을 받으러 나온 들뜬 아이들처럼 말이죠.

    길을 잃었고, 다리도 아팠고, 배도 고팠지만 그런 것들이 불쾌하거나 역증을 불러일으키진 않았어요. 어쩌면 우리가 헤맨 곳이 골목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화려한 상점과 인파로 가득한 대로가 아닌 골목길 말예요. 낮과 달리 밤의 베네치아는 한적했어요. 사람들의 발길은 적당히 드물게 이어졌고, 작은 가게들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삶이 흔적처럼 묻어 있었어요. 그래서 골목은 낯선 곳이었음에도 낯설지 않았고, 그렇다고 낯익지도 않았어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늘 살아왔던 곳 같은 느낌, 그런 거 다들 아시죠?

골목에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오갔다. 그리고 밤은 베네치아의 쇠락을 잘 숨겨주었다.

    웅장하고 거대하고 화려하고 놀라운 것들은 마음에 작은 여백이나 여운을 남길 틈도 없이 감정을 모두 소진시켜 버려요. 하지만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은 마음에 많은 빈자리를 남겨 우리가 언제든 그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만드나 봐요. 베네치아는 그렇게 마음속에 새겨져 있어요.


*이 글은 <<경북매일>>신문에 발표했던 것을 수정한 것이다.




커버 사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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