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답을 쓴 아이에게 '합격!'을 외쳐주어야 하는 이유
2학년 수학. 받아 올림이 있는 덧셈을 공부하는 시간. 수학익힘책까지 풀었는데 시간이 남았군요. 이럴 때는 칠판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아주 쉬운 문제를 써 주고 풀게 합니다. 다 푼 아이는 가지고 나와 선생님의 '합격!'을 받으면 놀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방식을 좋아합니다. 어차피 곧 쉬는 시간이라 누구나 놀게 될 텐데도 아이들은 자기가 공부를 잘해서 놀게 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문제가 워낙 쉬우니까 대부분 아이들이 문제를 가뿐하게 풀지만, 급한 마음에 더하기를 빼기로 착각하는 실수를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풀게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놀게 하려는 게 목적이니까요. 대신 아이가 잘못 쓴 답을 제가 재빨리 지우고 답을 써 줍니다. 그런 다음 '합격!'이라고 말해줍니다. 제가 이렇게 해 주면 아이는 아차, 실수했네요, 이러면서 씨익 웃습니다. 저도 가벼운 웃음으로 답해줍니다. 틀렸는데도 통과시켜주는 걸 이상해하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자기는 열심히 풀어서 통과했는데 선생님은 열심히 하지 않은 친구도 통과시켜주니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나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저의 이런 방식을 좋아합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틀려도 제가 답을 써 줄 걸 알고 일부러 틀린 척하기도 합니다. 유머를 아는 거지요. 아이 다운 행동입니다.
그런데 가끔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습니다. 제가 답을 고쳐 써 줘도 웃기는커녕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기 손등을 깨물거나 머리통을 꽁, 때리는 아이가 있습니다. 자책하는 거지요. 이상한 건 오히려 공부를 좀 하는 아이 중에 이런 아이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자기 답이 맞든 틀리든 별로 개의치 않는데 이런 아이들은 왜 안 해도 될 자책을 할까요? 이런 아이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 건강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들여보아 줘야 합니다. 어차피 내가 틀려도 선생님이 답도 고쳐주고 합격을 줄 거라는 걸 알 텐데도 문제를 틀릴 때마다 자책하는 아이. 왜 그럴까요? 공부를 잘하는 아이니까 틀리는 경우라야 아주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잖아요. 이 정도면 다들 그냥 넘어갈 만하잖아요. 근데 이 아이는 그게 안 되나 봅니다.
무엇이 아이를 자책하게 만드나?
나 : 왜 네 머리를 스스로 때렸어?
아이 : 답을 틀렸잖아요.
나 : 괜찮아. 선생님이 고쳐줄 텐데 뭐.
아이 : 그래도 틀린 건 틀린 거죠.
나 : 그때 어떤 마음이 들었어?
아이 : 저 원래 이 문제 안단 말이에요. 근데 틀렸잖아요. 기분 더럽죠.
나 : 아하, 선생님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답을 틀려서 속상했다는 말이구나?
아이 : (잠시 머뭇거리다가) 네.
나 : 선생님한테 보여주고 싶은 멋진 모습은 어떤 모습인데?
아이 : 공부 잘하는 모습이죠. 지난번에도 실수해서 선생님이 답을 고쳐주셨잖아요. (자기 머리를 또 쥐어박으며) 멍청이! 똑똑한 아이는 틀리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쉬운 문제를 틀리다니! 완전 어이가 없죠.
나 : (아이가 또 자기 머리를 때리려는 걸 말리며) 원래 2학년은 실수해도 되는 학년이거든. 그리고 내가 보니 넌 공부를 잘하던데?
아이 :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닐걸요. 형우가 더 잘해요. 걘 오늘도 하나도 안 틀렸어요.
나 : 형우가 오늘 안 틀린 건 맞아. 근데 형우도 실수해. 2학년은 원래 그렇거든. 혹시 선생님이 널 실수 잘하는 아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되니?
아이 : 원래 전 실수를 잘 안 한단 말이에요. 바보나 실수하는 거잖아요. 근데 제가 또 틀리면 선생님께서 진짜 바보라고 오해하실지 모르니 절대 실수하면 안 되죠. 그래서 오늘은 문제를 꼼꼼하게 읽었단 말이에요. 근데 덧셈을 뺄셈으로 잘못 계산하고 말았죠. 그랬더니 선생님이 지우개로 내 답을 슥슥 지우고 정답을 써주시는데 얼마나 창피했다구요. 그리고 합격이라고 그러셨잖아요. 원래 답이 틀리면 합격이 아닌데. 불합격이잖아요. 빵점이라구요. 그런데 선생님은 합격이래요.
나 :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합격이라고 했어. 다음엔 실수 안 할 거 같아서.
아이 : 근데 저도 할 말은 있어요. 제가 왜 덧셈을 뺄셈으로 착각했냐면 어제 엄마랑 뺄셈(덧셈 다음에 뺄셈을 배운다)을 엄청 풀었거든요. 그래서 착각한 거지 원래 착각 안 해요. 그니깐 다른 아이들처럼 저도 실수를 잘하는 아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죠. 저는 진짜 실수하는 아이가 아니니깐요!
나 : 아, 그렇구나. 앞으로 너는 실수 안 하는 아이라고 생각할게. 그런데 아까 손등은 왜 깨물었어?
아이 : 마음이 너무 조마조마해서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깨물었어요.
나 : 손등 깨물 때 안 아팠어?
아이 : 아팠죠.
나 : 아프면 안 깨물면 되잖아.
아이 : 제가 저도 모르게 손등을 깨물죠? 그럼 아프겠죠? 그러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아요. 그럼 편해지죠.
나 : 아픈데 왜 마음이 편해졌을까?
아이 : 아프니까요. 내가 실수했으니까 손등이 아파도 괜찮죠.
아이의 말을 들어보니 충분히 이해되는군요. 하지만 이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몇 가지 특성을 보입니다.
- 나는 똑똑한 아이다. (똑똑한 아이여야 한다.)
- 나는 실수하면 안 된다. (실수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똑똑한 것, 실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강박적인 생각을 하고 있군요. 요즘 갈수록 공부 못한다고 자신을 비하하는 아이들이 늘고 있는 세태에 비교하면 의외입니다. 걱정스러운 건 현재 수준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게 문제군요.
스스로 높은 수준을 만들어 놓고 나는 '이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높은 수준을 유지하려면 기운을 써야 한다는 게 문제겠군요. 근데 아이의 현실은 어떤가요? 가끔 실수하는 존재니까, 그럴 때마다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아이는 태어날 때 나르시시즘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일종의 전능감입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지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기는 정말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니까요. 울음으로 말입니다. 울고 있으면 엄마가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자신의 불편을 해결해 주잖아요. 기저귀가 젖어 축축한 느낌이 싫어 울었을 뿐인데 엄마는 무슨 초능력이 있는지 바로 알아듣고 보송보송한 새 기저귀로 갈아줍니다. 배가 고파서 울면 젖을 주고 누워있는 게 지루해서 울면 안고 바깥 구경을 시켜줍니다. 추워서 울면 옷을 입혀주고 심심해서 울면 손에 장난감도 쥐여주지요. 말 못 해서 울었을 뿐인데 엄마가 알아서 해 주니 아이는 엄마를 조종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감도 생겨납니다.
자신감은 불안에 맞서게 해 줍니다. 배고픈데 엄마가 젖을 주지 않으면 아기는 죽을 수밖에 없지요? 아기는 언제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힘껏 울어댑니다. 굶어 죽을까 봐, 엉덩이가 짓무를까 봐, 누가 나를 해칠까 봐. 그러면 엄마가 와서 안아주고 불안은 해소됩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애초에 산처럼 많던 불안이 조금씩 줄어듭니다. 대신 그 자리를 자신감이 채우지요. 엄마는 내 편이라는 생각이 정착되고 엄마는 나를 절대로 버리거나 해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신뢰)도 생깁니다. 결국 신뢰와 자신감은 주양육자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되겠네요. 아이는 앞으로 신뢰와 자신감이라는 창과 방패를 들고 세상에 나아가겠지요. 여기까지는 아이의 성장이 순조로웠습니다. 엄마 처지에서도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것만 신경 쓰면 되었으니 그럭저럭 편한(?) 시간이었다고나 할까요? 이 기간(0세~4세)에 아이에게 만들어진 신뢰, 자신감, 불안의 크기는 아이의 타고난 기질과 결합되어 앞으로 아이 성격이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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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정글로 들어가다.
아이가 점점 자라 5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신뢰와 자신감의 원천인 엄마를 떠나 정글 같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맹수(내 편이 아닌 타인)들이 우글거리는 곳 말이지요. 어린이집, 유치원, 또는 학교가 되겠군요. 그곳엔 운다고 내 편 들어줄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고 항상 내 뒤에 든든한 엄마가 있는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언제 갈지 내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도처엔 나를 이기려고 덤빌 준비가 되어 있는 맹수(친구들)들이 가득하군요. 엄마와 함께 있을 때에는 신뢰와 자신감으로 든든했던 마음에 다시 불안이 채워집니다.
이럴 때 아이는 본능적으로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게 마련입니다. 어른, 즉 교사 말입니다. 아이는 불안해질 때마다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선생님을 목청껏 부르거나 울어보기도 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선생님에게는 엄마에게 받았던 자신감이 잘 느껴지지 않네요.
이럴 때 아이는 불안해집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친구들과 나누면 자기 몫이 줄어들 것이 뻔하지요. 그래서 아이는 교사를 독점하기 위한 방법을 찾게 됩니다. 우는 거지요.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울고 친구와 놀이에서 져도 울고 그냥 기분 나빠도 일단 웁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달려와 관심을 주지요. 잠시나마 아이의 불안은 해소됩니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는 더 오래 선생님을 옆에 묶어 둘 방법을 찾습니다. 그러려면 자기의 불안한 모습을 계속 보여 줘야겠네요. 이 상황에서 교사는 아이에게 사랑과 신뢰를 줌으로써 아이를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 정도에서 불안이 줄어듭니다. 엄마에 아직 모자라지만, 선생님도 자기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확인했으니까요.
문제는 여전히 불안이 계속 남아 있는 아이입니다. 이런 아이는 선생님이 정말 자기편인지 더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실수를 해도 예뻐하는지(미워하지 않는지), 공부를 못해도 싫어하지 않을지, 나의 높은 전능감을 선생님이 충분히 알아주실지는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자기의 능력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자기를 미워하지 않을(쫓아내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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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남는 길은 선생님의 사랑을 받는 길 뿐이야!
이런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불안이 높습니다. 근데 아이의 불안이 꼭 나쁜 건 아닙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 사랑을 받는) 방법을 찾게 만들거든요. 아이는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높은 수준의 전능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잘하고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수업시간에 설명도 잘 듣고 숙제도 꼬박꼬박 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면 혹시라도 내가 실수할 때 선생님이 용서를 해주실지 모르니까요. 아이의 속마음은 이러할 겁니다.
- 선생님께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어요.
- 내가 실수(덧셈을 뺄셈으로 착각)하는 아이라는 걸 선생님이 아실까 봐 불안해요.
- 만약 선생님이 아신다면 날 미워하실까 봐 걱정돼요.
- 하지만 내가 먼저 나를 처벌하면(손등을 깨물거나 머리통을 때려 자기 학대를 하면) 선생님은 날 혼내지 않겠죠.
- 더 큰 실수를 하면 손등을 더 아프게 깨물어요. 그러면 불쌍해서라도 나를 용서하시겠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아이는 갈수록 피곤해질 겁니다. 자신을 소진하는 일이니까요. 아이는 어쩌다 이런 아이가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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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는 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안타깝게도 불안이 높게 태어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예민한 거지요. 엄마가 정말 최선을 다해 돌보는데도 더 울고 안 자고 안 먹는 아이입니다. 남들은 유치원에 잘 가는데 엄마 치마를 붙들고 울며 늘어지는 아이, 친구가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한 걸 하루 종일 곱씹거나 한 친구에게 집착하는 아이지요. 이런 아이를 키우는 건 힘이 더 듭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일수록 더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 불안을 줄여줘야 합니다. 또 보통으로 태어났지만 양육 환경 때문에 불안이 커진 아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은 아이지요.
- 양말 빨리 신어. 그렇게 느려서 어떻게 학교 가려고 그러니?
- 아직도 글자를 못 읽어서 어쩌니? 선생님이 흉보시겠다.
- 학교 가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안 그러면 선생님한테 혼 나.
이런 말을 들은 아이는 학교에서 작은 일만 생겨도 불안이 먼저 올라올 수 있어요. 온통 긴장되어 경색될 수밖에 없지요. 이럴 때 누군가가 나서서 이곳은 안전하고 즐거운 곳이니까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엄마도 선생님도요. 실수해도 괜찮고, 공부를 못해도 괜찮다고. 너는 이미 존재 자체로 충분히 불안해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우린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고. 제가 틀린 답을 고쳐주며 '합격'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