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dquer Nov 19. 2019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으려면

갈망으로부터 비롯되는 집착과 혐오, 내 안에 존재하는 소중한 아이

 행복.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모르고, 갖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갖고 있지 않은, 참 모호한 녀석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지려고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도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것들이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삶이 '진정한' 행복으로 충만한 사람들의 수는 적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질 않는다. 행복이 뭘까요? 남 눈치 보지 않기, 행복해지기 위한 10가지 방법, 진정한 행복이란? 해외 사람들의 스토리, 하버드 교수의 논문 등등 등등! 적용할 수 없는 그런 얘기에 진절머리가 났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행복은 우리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환상인가?


 나는 내 삶이 불행해졌다고 확실히 느끼기 시작했던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행복을 찾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10년 동안, 행복해질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실행해보았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도 했고, 지식을 습득하기도 했고, 돈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려보기도 했고, 여행을 다니 보기도 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내가 '진정으로' 행복했던 시간은 없었다. 일시적으로 만족을 느끼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 행복해!'라고 말하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안정적이고 평온하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충만하며, 이 순간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없었다. 내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 가 있었고, 마음은 급하고 불안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실행과 도전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행이든, 지식이든, 돈이든, 인간관계든 뭐든 간에 나를 진정한 행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올해 들어 정말 '진정한' 행복한 삶 속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굉장히 간단한 깨달음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 일시적인 감정인가 싶어 두고 보았으나, 아니다.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졌다. 지난 10년 동안, 아니 평생 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과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10년 동안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난 왜 우리가 불행하며, 왜 행복해지지 못하는지 설명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행복해질 수 있는 자세한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 난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많은 심리치료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되리라 확신할 수 있다. 그 정도로 효과가 있다. 물론 완벽하게 컨트롤하려면 많은 수행과 지식, 깨달음이 필요하다.


참고로 내가 스스로 진정으로 행복하게 될 수 있었던 데는 10년 동안의 시행착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가장 효과가 있었던 두 가지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위빠사나 명상'이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모두 갈망으로부터 시작된 집착과 혐오로부터 나온다. 

좋다고 느끼는 감각에는 끝없이 집착하고, 안 좋다고 느끼는 감각에는 끝없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집착하는 것을 가질 수 없기에 불행하고, 혐오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불행하다. 좋은 감각에 대한 갈망, 나쁜 감각을 피하고 싶은 갈망. 끝없는 갈망은 매 순간 일어나며 그것은 집착과 혐오감을 만들어낸다.


갈망이 생길 때마다 충족시키는 것은, 계속해서 생겨나는 더 강하고 많은 갈망을 끝없이 충족시켜야 한다는 불가능한 결론에 도달한다. 반대로, 갈망을 충족시키지 않게 되면, 그것은 집착과 혐오로 변질되며 더욱 강한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강한 집착과 혐오를 충족시키지 않게 되면, 당연히 큰 고통이 따를 것이다.


어느 쪽이나 불행이 뒤따른다. 유일한 방법은 애초에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갈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제 3자 입장에서 관조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려면 실제로 경험이 필요하다. 위빠사나 명상 코스를 통해 정확한 배움이 필요하다.)


위빠사나 명상 코스를 통해서 이를 경험을 통해 깨닫고 배운 이후 나는 이것을 실천에 옮겼다. 남을 혐오하지 않고 선을 실천하는 삶 말이다. 행복했다. 매일 끝없이 요동치는 내 마음을 관찰하면서,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감각이 생겨났다 사라지듯, 갈망 또한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렇게 사고 싶었던 책도 며칠 후에는 잊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도 내게 남아있는 것들은 실행에 옮겼다. 편안한 마음 상태가 되어갔고 세상은 아름답게 보였다. 문화라 불리는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 인간의 갈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들이다 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참 편했다. 혐오감은 스트레스를 불러오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은 함으로써 스트레스를 일시적으로 풀었다는 좋은 감각에 대한 갈망은 새로운 집착을 만들어낸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다.


관조하고 관찰하기


이것은 잘 작동했다. 하지만 그래도 애매했던 부분은 인간관계였다. 내가 남을 혐오하지 않고 선을 실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지 않다면? 내가 깨달은 자 라면 가능하겠지만, 당장 실제로 실천하기는 어려웠다. 때로는 내가 많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내 수준에서 실천하였지만 뭔가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라도 본래의 나로 돌아가면 다시 불행해질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물론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수행과 깨달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 지내던 와중 나는 한 책을 읽고 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고, 그 이후로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중심을 잡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위의 가르침에 더해서,

'내 안에 존재하는 순수한 작은 아이 같은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 안에는 순수한 아이가 한 명 있다. 나는 논리, 과학, 경제, 지식, 책, 이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친구는 기하학, 그리기, 시각적인 것, 조화를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에 갈망을 하고 집착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지시를 내린다. 우리는 그것이 매우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알아차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순위로 매겨지는 등수를 보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아보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가? 동시에 우리 안의 작은 아이에게는 이렇게 들린다는 것을. "너는 성적이 왜 이것밖에 안 나왔니? 공부 좀 해라."


집에서 무언가를 하려는데 부모님께서 '넌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뭘 하니? 밖에 좀 나가서 뭐라도 좀 해라'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무언가를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내 생각엔 좀 힘들 것 같은데? 네가 할 수 있겠어?'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안 그래도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는데 주변 사람들이 계속해서 간섭하고 잔소리를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는 않고, 주변 사람들이 내가 가진 것과 외적인 것만으로 판단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기분 나빠하면서 똑같은 행동을 우리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내게는 하고 있는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내리는 결정, 행동, 생각은 내가 나 자신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안에 존재하는, 순수한 작은 아이 같은 또 다른 나' 에게 지시하는 것이다.


아이 교육으로 예시를 들어보자. 우리의 아이가 공부는 잘 안 하고 레고 조립이나 공룡에 관심이 많다고 가정해보자. 그 아이에게 '너는 왜 쓸데없이 이런 거나 하고 있니? 공부해라'라고 말하면서 책상 앞에 앉혀놓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까? 아니면 아이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잘 생각해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까?


또는 '다른 아이들이 모두 학원에 가니 너도 학원에 가야만 뒤처지지 않는다.' 라면서 무작정 학원을 보내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아니면, 전문가와 함께 아이를 잘 관찰하며 필요한 도움을 주고, 생각을 확장할 수 있게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이에 대한 답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에게 너무 과한 일방적인 사교육을 시키는 부모들을 보면서 아이가 불쌍하다고 여긴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나와 똑 닮은 순수한 아이에게 매 순간 같은 짓을 하고 있다.


그 아이는 우리 자신이며,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다. 세상의 어떤 존재도 나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언정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우리 안의 또 다른 나에게 폭언을 하고 혐오하고 집착한다.


'나는 더 멋있어져야 해'라는 욕망은 동시에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게 '지금 넌 못생기고 못났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스트레스받아'라는 말은 동시에 또 다른 나에게 '넌 중요치 않아. 넌 나 자신이지만, 그래도 내겐 너보다 다른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 난 이것밖에 못하지, 난 한참 부족하네'라는 말은 동시에 또 다른 나에게 '넌 왜 이것밖에 못 하냐?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의 어느 무엇도 나 자신과 동일하면서 동시에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보다 중요할 순 없다.

내가 중심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항상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어느 무엇보다 소중하며 귀한 존재다.

힘들어하는 어린이들을 가엾어하듯, 우리 안의 순수한 아이를 그런 아이들을 보듯 소중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갈망으로부터 시작된 집착과 혐오감은, 동시에 내 안의 작은 아이에게 그것을 성취하도록 명령하는 것과 같다. 그 아이가 그것을 원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내가 원하니까.

이게 아이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는 부모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런데 우리는 이 행위를 매 순간 스스로 행하고 있다. 


과거 10년간 나 또한 그래왔다. 하지만 내가 이 작은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린 후로, 그 아이를 존중하면서 함께 합치가 되어 행하는 행동과 생각은 모두 행복이라는 건실한 토대 위에 하나씩 쌓여나갔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거나 우려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해보면 추후에는, 나와 그 작은 아이가 조금씩 함께 마음이 맞아가는 것을 느끼고, 긍정적이고 건실하면서 더욱 강력한 동기와 행동력을 가지게 되는 것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고, 가끔씩 행복함에 가슴을 움켜쥐기도 한다.


세상에 중요한 것은 참 많지만, 어느 무엇도 '우리 안에 존재하는 작은 아이 같은 또 다른 나' 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 생각하고 억지로 부모들은 아이들을 이끌지만 그 결말은 대부분 정해져 있다.

우리의 아이도 똑같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을 그만두고, 우리의 아이에게도 집착과 혐오감을 그만두자. 그러면 기죽었던 내 안의 순수했던 아이는 신이 나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큰 소리로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가 쉽게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이고, 진정한 우리의 모습인 또 다른 나 또한 우리 안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 안을 면밀히 들여다보자. 모든 것은 우리 안으로부터 시작되고, 우리 안에 존재한다.


작가의 이전글 삶의 프레임은 어떻게 고착화되어가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