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페어가 끝나고 다음날, 오빠네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오빠는 프러포즈를 하고 거의 이주만에 우리 집에 왔는데, 나는 몇 달이나 지나서 인사를 드리러 가니 사실 마음이 조급했다. 물론 우리의 의사를 존중해 주실테지만, 그래도 빨리 인사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틈틈이 타이밍을 봤다. 언제쯤 갈까? 지금인가? 지금일까? 조금 더 기다릴까? 하던 차에 드디어 대체공휴일이자 어머니의 생신인 5월 6일에 오빠네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오빠의 시골집으로 가야 했는데, 순천 근처라고만 들었는데 사실 보성이었다. 4차선이었던 도로가 좁아지고, 점점 마을 이름이 표지판에 많이 나오더니 도착하였다. 오빠네 시골집은 상상보다 더 컸다. 단층주택이었고 초록을 머금은 잔디가 마당을 가득 채웠다. 마당에 꽃무늬 테이블보가 얹힌 식탁이 있었는데,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오빠는 그것만 보고도 "밖에서 점심 먹자고 준비하셨나 보다." 했다.
마중 나오신 어머님은 팔에 깁스를 하고 계셨다. 화단을 가꾸시다 잘못해 금이 갔다고 하셨는데,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에 많이 놀랐다. 오빠도 놀란 걸 보니 걱정하실까 봐 이야기를 안 하신 듯했다. 놀란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아버님과 첫인사를 하였다. 어머님은 부산에서 종종 뵈었는데, 아버님은 처음 뵙는 거라 조금 긴장했다. 그런데 아버님이 오빠와 꼭 닮아 긴장이 금방 사라졌다. 예전에 어머님을 처음 뵈었을 때에는 오빠가 꼭 어머님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님을 뵈니 아버님과도 꼭 닮았다. DNA는 늘 신기하고 그 덕에 한 가족 속에 내가 들어왔다는 더 실감 났다.
인사를 드리고 마당으로 나왔는데, 비 온 뒤 명랑한 초록색이 가득한 마당과 맑은 하늘, 멀리 커다란 팽나무까지, 한눈에 담기 힘든 풍경을 보며 점심을 먹는다니 신기하고 너무 좋았다. '오빠네에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가는 자리'가 나한테만 중요하고 긴장되는 자리는 아니었던 게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정말 음식을 많이 준비해 주셨다. 부산에서 보기 힘든 맛조개부터 전복, 꽃게, 삼겹살까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 맛있게 구우신 걸 제일 먼저 챙겨주셨는데 나를 환영해 주시는 행동 같아 더 큰 감동이었다.
밥을 먹고는 마당에 심긴 나무를 하나하나 소개해 주시고, 근처 축제에도 함께 갔다. 가는 길에 동네 이야기, 보성 이야기도 들려주셨는데 내가 모르는 세상을 하나씩 안내해 주시는 것 같았다. 점차 가족이라는 세계가 넓어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와 오빠가 가족이 되는 게 실감 났고, "사이좋게, 재미있게 잘 살겠습니다." 하는 인사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제껏 잘 키워주신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이 만났으니 이에 감사하며 정말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진 모르겠지만 이런 마음으로 정말 잘 살아야지! 재미있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