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하는 혼종적 시선들
제이디 차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
스페이스 K
2023. 7. 13 - 10. 12
“옛날 옛적에”로 운을 뗀 배추도사 무도사는 책장을 넘기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구전되온 우리네 설화를 맛깔나게 들려준다. 에~헴 소리와 함께 술술 풀리던 이야기보따리는 브라운관 앞에 모여든 아이들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이디 차Zadie Xa는 과거의 배추도사 무도사를 대신해 기꺼이 화자 역할을 맡는다. 한국계 캐나다인인 차는 그녀의 한국인 어머니가 어릴 적 들려준 머리맡 이야기들로부터 ‘구미호’를 소환한다.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구미호’는 신통하고 교활한 능력으로 사람을 홀려 잡아먹고 만다는 소문 탓에 예로부터 부정적 존재로 여겨져 왔다. 작가는 구미호를 통해 민속 신화부터 대중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야기 속 소외된 존재들을 탐구한다. 사기꾼Trickster, 잡종Mongrel, 짐승Beast 따위의 말로 사회에서 천대당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의 동물들은 구미호에 비유되어 변신 능력과 잠재력을 드러낸다. 작가는 그들의 행동 특성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때도 있지만, 생존을 위한 필연적 전략이었음을 지적한다. 종과 종이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과 소화, 배설의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통 해 소외된 동물을 사회구성원으로 동화시키고자 한다.
‘할머니’ 역시 여러 문화에서 약하고 무력하며 경제성 없는 존재로 여겨졌고, 종종 표독스러운 마녀나 고약한 노파로 묘사되기도 했다. 차는 약한 존재인 할머니를 뒤집어 지혜롭고 강인한 한 명의 캐릭터로 재해석을 시도한다. 여성이 주도해 온 한국 설화와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은 전시의 도입부에서부터 등장한다. 통찰력 있는 우주 만물의 창조신인 마고할미는 지혜와 권력의 주체로서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다. 한국의 월출과 밴쿠버의 일몰을 담은 조각보 사이 해태를 탄 마고할미는 한국과 캐나다, 창조와 죽음, 전통과 현대를 매개하는 중간자이자 두 세계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고할미 뒤로 이어지는 공간은 출구를 숨겨둔 채 관람객을 미혹한다. 작가는 미로迷路와 미궁迷宮을 구분하여 공간에 각각의 의미를 모색한다. 미로는 입구와 출구가 많아 드나듦이 비교적 용이한 반면, 미궁은 단일 출입구가 만든 하나의 길로 인해 개인적이고 영적인 여행에 가깝다. 혼란스러운 카오스에서 관람객은 꼭두의 안내를 받으며 방관자에서 수행자로 승격되고 막다른 길에서 고립된 상태의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좁은 길은 회화와 보는 이의 간극을 좁히고 초상화가 담은 존재에 집중하게 만든다.
미로에는 갈매기, 개, 여우 따위의 동물과 인간을 혼합한 다양한 반인반수가 등장한다. 익숙한 듯 낯선 모습을 한 혼종적 캐릭터들은 마치 신화 속 존재처럼 성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차는 동물이 전 세계 문화 전반에 걸쳐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방식과 민화에 그들을 차용하는 형식에 관심을 두고 각자의 고유한 주체성에 주목해왔다. 특히 오늘날 도시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폄훼되는 것을 우려하며 동물의 지위를 높이고 격상시키고자 했다. 하이브리드 종의 탄생은 사회 내 여러 존재의 공존과 연대를 위해 취한 전략적 방법이다. 주변인 정체성을 합성해 만들어낸 ‘잡종’은 다자간의 경계를 전복시키고 이데아적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서로 합체되고 분열됨으로써 이 잡종적 타자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전에 없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는 곧 제이디 차 개인의 존재적 사유다. 한국계 캐나다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혼종의 정체성과 타자성에 관해 탐구해온 그녀의 세계관이 담겨있다. 이야기꾼 차의 비선형 내러티브는 자연 세계를 재구성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또한 익숙함을 뒤집고 뒤섞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고 사회 구조의 변화를 꾀한다. 작가의 실천은 해석된 세계에 이미 부여된 가치를 재검토하고 혼종적 시선을 교차하게 만든다. 교차한 시선 끝에 생성된 수많은 노드들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개의 축이 되어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이로써 제이디 차의 이야기는 강력한 서사의 힘을 갖게 된다.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생산이야말로 세계를 만드는 힘이며 잡종들과의 공생sympoeisis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제이디 차의 이야기를 덮으며, 한 권의 성스러운 글이 아닌 여러 뭉치의 이야기보따리가 작가를 통해, 또 우리를 통해 곳곳에 펼쳐지기를 바라본다. 옛날 옛적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에.
임옥희, 종과 종이 접촉지대에서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도나 해러웨이, 『종과 종이 만날 때』최유미 옮김 (갈무리, 2022), 여/성이론 통권 제47호, 2022. 177.
이상윤, 사이버네틱 포스트휴먼의 비판적 재구성으로서 한국미술의 사이보그와 가이노이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42집, 2021. 138p.
임옥희, 도나 해러웨이: 괴상한 친족들의 실뜨기 놀이, SEMINAR Issue01, 2019. https://shorturl.at/cdsH9
Alice Bucknell, Zadie Xa’s Ecological Allegory, Frieze, 2021. https://www.frieze.com/ko/article-zadie-xa-moon-poetics-2021-review
임옥희, 위의 글.
글, 사진: 문혜인
자료: 스페이스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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