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한 번 읽고, 다시 읽으며 든 감상을 1부의 시들로 풀어내본 글이다. 1부 이후의 시들을 아래 쓴 이야기를 동어반복하지 않고 풀어내기 어려운 탓에 보잘것없게도 몇 개의 시만을 가지고 감상을 풀었다.
글을 올리기 전에 가장 앞에 쓰인 시인의 말을 돌아본다. "생활하고 싶었다." 생활하고 있다, 생활할 것이다, 생활하고 싶다도 아닌 '생활하고 싶었다'고 고백하는 문장. 내게는 여기서 어떤 마음 약함의 정서가 느껴진다. 생활한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활이라는 단어에는 몸의 구체적인 물성과 환경과의 조화로움이 있다. 몸을 움직이고,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것. '싶었다'에 들어있는 과거형은 그러한 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는 말 같기도, 그럼에도 더 생활하고 싶다는 바람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지금 생활하고 있을까. 시집이 남겨준 가장 질긴 물음을 곱씹어 본다.
문법
눈을 뜨니
풀밭이 펼쳐졌다. 펼쳐지는 풀밭의 속도를 따라잡으려다가 멈춘 것처럼 꽃이 있었다. 예쁘다고 말하면 뭐가 더 있을 것처럼 예뻤다.
뒤로 물러나면 더 많이 보이고 많이 봐서 끝이 보일 때
뭐가 있어?
이불을 끌어다 덮으며 네가 물었고 뭐가 있다고 하면 끝이 안 나는 풀밭이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까지 따라오는 풀밭이었다. 빛이 부족해지면 풍경은 생기다 말았다는 듯 풀이 죽었고
그만해
그런 말은 풀을 뜯어내고 남은 말에 가까웠다.
첫 시다. "눈을 뜨니" 펼쳐진 풀밭에서 시집은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눈을 뜨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별다른 이유가 없다. 하지만 화자가 눈을 뜨는 순간, 안과 밖은 구분되기 시작한다. 눈 안쪽의 세계와 눈 바깥의, 내가 보고 있는 (혹은 속해 있는) 세계. 한 번 풀밭을 보게 된 화자는 이제 그곳을 지울 수 없다. 다시 눈을 감아도 풀밭이 "눈꺼풀 안쪽까지 따라오"게 된 것이다. 내게는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이 '바깥'을 보고, 그곳에 놓이고, 그곳을 외면할 수 없게 된 이가 어떻게든 눈 안쪽의 세계와 눈 바깥의 풀밭 사이에 언어를 새기는 과정으로 쓰인 것만 같다.
위 시에는 '너'의 존재가 등장한다. '너'는 질문한다. "뭐가 있어?" 이것은 최초의 질문이다. 뭐가 있길래, 너는 그걸 보는 거야, 그걸 쓰는 거야. 그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뭐가 있어- 풀밭은 끝이 나지 않는다. 말이 가진 힘이란 그런 것이다. 뱉어야만 하는 시인으로서의 자각. '너'는 풍경을 지우려 한다. "그만해". 그러나 이 명령에 가까운 진술은, 화자에게는 덩그러니 남겨진 말에 불과하다. 그는 써야 한다. "예쁘다고 말하면 뭐가 더 있을 것처럼" 예쁜 풀밭의 끝을 끝없이 지연시키며 써야 한다.
위 시 화자가 눈을 뜨니 풀밭이었던 것처럼, 시집의 많은 시들이 이유 없이 어떤 행동을 통해 특정 상황을 맞는다. "버스에서 내려 이정표를 따라"가거나(「결혼식」), "마을을 벗어나면" 나오는 이웃 마을을 상상하거나(「흔적」), 단순하게 "무슨 일이 일어"난 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입구가 생겨나거나 하며. 일상의 행동이 불현듯 서술될 때마다 그곳에는 그 행동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세계가 생겨난다.
아름답고 화창한 날
나와 보니 밖이었다. 밖은 안에 있는 게 없었다. 없는 게 있으면 밖은 지속되고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밖에서는 누가 있는지 모른다. 지나간다. 지나가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밖은 빈 데 없이 많고
널리 퍼져 있고
끝이 안 보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려면 밖을 옮겨야 하는데
밖을 옮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걸리는 게 많으면 피곤해진다. 어디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밖은 만연해 있다.
위 시 역시 이렇게 시작한다. "나와 보니 밖이었다." 왜 화자가 나와야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탄생에 관한 말 같기도 하다. 다만 그곳은 "없는 상태로 / 지속되는 밖"이다. "끝이 안 보"이는 밖을 화자는 어떻게든 "옮겨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어디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 밖은 만연해 있다"고 토로한다. 실은 피곤하고, 어딘가로 들어가 숨고 싶지만, 만연해 있는 밖을 옮겨내는 것을 자신의 일이라 여기는 태도가 이 시에는 있다.
'시가 뭐라고 생각해?'라는 질문을 들은 적 있다. 예전부터 마음에 있던 대답. 시는 새야. 분명히 그렇게 느끼면서도, 사실 나는 발자국 같은 시를 써온 것만 같다. 새에게는 발자국이 없는데. 어쩌면 시는 새가 남기는 발자국일 수도 있겠다, 시집을 읽으며 생각했다.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정동을 포착해 남기려는 시는 때때로 상황과 무관해진다. 맞닥뜨리는 상황 자체를 외면하지 못하는 시는 그렇지 않다. 둥지에서 벗어난 시, 질문을 지나쳐 날아가버리고 싶은 시, 그러나 안과 밖의 틈새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끝내 사라질 발자국을 남기고야 마는 시.
"풀이 자랐다. 풀이 자라는 걸 알려면 풀을 안 보면 된다. 다음 날엔 바람이 불었다. 풀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내가 알게 된 것을". 「휴일」에서 시인은 썼다. 이는 「문법」에서 화자가 보던 풀밭과 연결되는 이미지다. 해당 부분의 문장을 조금 재조립하자면, '풀을 보고 있으면 풀이 자라는 걸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화자는 풀을 본다. 풀은 이미 그곳에 있다. '나'는 자연스레 '내'가 알게 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는 내가 나를 의식하는 문장이다. '나는 무엇을 알게 되었다'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를 나는 알게 되었다'라고 쓸 때, '나'는 '나'의 바깥에 서게 된다. 손쉬운 이야기겠지만 자아의 분리가 일어난다. 조금 더 나아가자면, 이는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의 첫 문장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두고 왔다"고. 또 다른 두 시의 일부를 보자.
집에 누가 와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따라나섰다. 집에 가는 길인데도 누군가의 안내를 받는 게 이상했지만
안내를 받으니까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서상조라고 합니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기다렸던 게 뭔지에 대해 내가 말할 차례였다.
- 「주인」 중에서
빙 둘러앉아서 수건 같은 걸 돌리고 있다가 한 사람이 일어났으므로 따라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어지러웠는데
(중략)
한 사람을 따라갈 때는 어디 가는지 몰라도 됐는데 한 사람을 잃어버리고부터는 생각해야 했다. 이게 이마를 짚고 핑그르르 도는 사과의 일이더라도
사람을 잃어버리고 돌아가면 사람들은 물어올 것이고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 「야유회」 중에서
「주인」에서 화자는 집에 가는 길이다. 그런데 내 생활이 있는 공간으로 누군가 나를 데리고 간다. 도착한 집에는 서상조라는 구체적인 이름이 있다. 이 이름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 이름은 어떤 낯선 감각을 불러온다. 내가 아닌 명백한 '타자'의 존재. '잃어버린 나'와 같은 분리된 자아에게 도착하는 줄만 알았던 독해가 갈피를 잃는다.
"한 사람을 따라갈 때는 어디 가는지 몰라도 됐는데" 이어지는 시에서 화자가 독백한다. "한 사람을 잃어버리고부터는 생각해야 했다." 그러니까 두 시를 애써 연결 지어 보자면, 화자는 모종의 사건을 겪고 '집'이라는 내면의 공간에 앉아있는 타인을 마주한다. '내'가 아마도 '나'를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고백, "나를 두고 왔다"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미아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길이나 집을 잃고 헤매는 아이'라는 뜻. 하지만 내가/네가 나를/너를 잃어버렸을 때에도 우리는 미아가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너/나로부터 미아가 됐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미아가 된 자는, "모여 있던 아이들이 빠져나간 후에 남은 의자처럼 / 찾아가지만 앉는다면 / 거기 그대로 앉아 있을 것이다. (「공원에 많은 긴 형태의 의자」)" 외부의 세계와 내면의 자아 사이에 놓인 의자. 시인이란 그러한 잃어버림의 상태로 모두가 떠난 의자에 앉아 장면을 적어내는 자일 것이다. "쓴다는 것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하지만' 중얼거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라고 임승유 시인은 적었던 바 있다(「운동장을 돌다가 그래도 남으면 교실」, 『문학들』 2019년 봄호).
덧붙임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아직 그렇게 추운 날씨가 아니라면 옷장에 외투가 그냥 있다. 신발장에 털 부츠가 그냥 있다. 장갑이 놓여 있고 머플러가 걸려 있다. 걸려 있는 머플러가 늘어지다가
발에 밝히는 저녁 혹은 어느 날의 아침 한파는 갑작스럽게 찾아오고 나는 양말을 두 개 신는다. 장갑을 낀 손으로 머플러를 두르다 잘 안 돼서 장갑 벗고 머플러 두른 후에 집 밖으로 나와
아 추워 그러면서 털 부츠의 따뜻함과 묵직함으로 털 모자의 높이와 기모 들어간 스커트의 깊이로 겨울의 감각에 어울리는 사고를 하며 털 부츠 안으로 겨울의 감각이 스며들 때까지 더 이상 겨울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겨울일 때까지 아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뻔하지만 1부를 벗어나 마지막 시는 이야기하고 싶다. 안과 밖을 오가던 시인이 길 위에 있다. 길은 문을 열고 나와 새로운 문을 여는 곳까지 이어진 연결지대다. 길에 나서기 위해 화자는 장갑을 끼고 벗고를 반복하며 끈질기게 외출 준비를 한다. 양말 두 개와 머플러, 털 부츠로 나를 지키기 위해. 길은 한파 안에 있고, 겨울이다. 첫 시에서 나왔던 풀밭보다 한층 차가운 곳이다. 이제 시인은 "눈을 뜨니" 존재하는 곳을 보는 이가 아니라, 직접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서는 이다. 겨울로 오게 된 이다.
동시에 시인은 "털 부츠 안으로 겨울의 감각이 스며들 때"를 기다린다. 털 부츠로 나를 보호하고 싶으면서도 겨울의 감각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는 모순된 감정이다. 그러나 이는 시집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시인의 솔직한 마음이다. 바깥은 무섭지만, 내가 있을 곳은 "빈틈없는 내부가 아니라 떨고 있는 외부라야 하니까"(「대식 씨」). 문 여는 사람은 떨림을 통해 끊임없이 갈라지는 안과 밖의 운동을 진동계처럼 성실히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