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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찬 Mar 06. 2023

청주3

할아버지 머리숱처럼

산에는 온통 하얀 눈이었다

눈 위에 눈이 세월없이 쌓여갔다


할아버지는 이 풍경을 보며

죽음을 준비했을까

더 이상 인가가 아닌 집에

죽음이 삶처럼 누워있었다


긴 동면

겨울 다음에 다시 겨울이 올까


구르지 않는 자전거 바퀴

하나의 길밖에 없던 마을에서

하나의 길밖에 몰랐을


바스러져 갈 집 한 채

오랜 친구를 잃은 강아지는 캥캥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할아버지,

수평선이 그리워질 땐 어떻게 했어요


죽음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고 싶어요

더 어린 발의 보폭으로

하염없이 하염없이


그림자 위엔 왜 눈이 쌓이지 않을까

자라지 않게 된 머리카락처럼

눈이 그쳐갔다


나는 죽으면요, 꽃이 될래요


말하는 아이

피워내기 위해 죽어야 했던 어둠 한 송이가

산등성마루에 닿아 부서지기 시작했을 즈음


물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언젠가

할아버지 얼굴처럼 오래된 나무를 생각하며

눈을 차곡히 개어 두고


하나밖에 없는 길을 따라

작은 마을로 걸어가고 싶었다


구불구불 난 길을 펼쳐

생의 길이를 재보고 싶었다


그림자 아래

꽃을 틔워냈을 무덤가에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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