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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찬 Nov 07. 2022

숨과 숲과 수프, 그리고 슬픈

국립극단 청소년 극 <발가락 육상천재>를 봤다. 자갈초 육상부에 달리기를 아주 잘하는 전학생 정민이가 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낸 극이었다. 은수는 극 중 달리기에서 맨날 꼴찌를 한다. 그러고도 언제나 친구들 앞에서 실실 웃는 은수는, 앞서가는 애들을 뒤에서 보는 게 마음이 편하다며 꼴찌가 좋다 말한다. 바람이 얼굴에 닿는 게 좋다고. 그랬던 은수가 종장에 이르자 자기도 실은 1등을 하고 싶었다고 크게 소리친다. 그 마음을 인정하고 달리는 은수의 표정이 홀가분해 보였다. 어쩌면 은수에게는 1등을 하는 것보다 1등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은수를 보며 이 아이는 1등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어른으로 자랄 수 있을 거야, 여기게 되었다.


혼자 산책을 할 때 학교가 근처에 있으면 잘 지나치지 못한다. 그곳을 매일같이 오가며 아이들이 보내게 될 수년의 시간을 상상하곤 한다. 얼마 전 걸었던 밤의 숲. 중간에 있던 고등학교. 어떻게 여기에 학교가 있지, 두근거리며 생각했다. 숲을 끼고 있는 학교에서 보내는 3년은 어떤 걸까. 저녁을 먹고 잠시 숲을 걸으며 나누는 대화. 막연한 미래와 스치는 현재를 농담으로 버무린 그 말들(그 속에 있는 10%의 불안, 10%의 진심, 10%의…). 야자를 째고 숲을 가로지르는 모습. 수업 시간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의 움직임과 빈 공간을 채우는 빛. 온통 피곤하겠지만, 아주 조금은 산책을 닮아있을 등하굣길. 아이들이 마음에 가지고 있을 저마다의 온유함이 그런 생활을 통해 어디선가부터 흐르기 시작할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지나, 그중 한 아이는 숲을 걷고 있을 것이다. 가로등 빛이 적게 닿는 길로 발을 이끌며 밤의 산책로를 걷고 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두워진 곳에서 갈라지는 길을 앞에 두고 문득 멈춰 설 것이다.








요즘은 전진희 앨범 《Breathing》을 숨 쉬듯 듣는다. 숨을 쉬고 싶어 적어낸 소리라고 했다. 지금은 이 음악들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애도처럼 들린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나의 죽음을 미리 슬퍼해본 사람은 조금 숨을 쉬게 될 수 있는 걸까.


야간 철도 일을 할 때는 내내 어두운 철로에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있었다. 주변이 어둠이었으므로 숨이 흩어지는 모양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보였다. 숨의 입자와 숨의 흐름을 보는 일은 신기했다. 숨을 들이마신다. 숨이 내 몸 어딘가를 휘휘 젓는다. 들이마신 것과 같은 양의 숨을 내뱉는다. 숨이 나를 빠져나가 어딘가로 떠난다. 그때 숨은 꼭 영혼의 일부 같았다.


마음 숲을 저어주는 티스푼 같은 숨을 상상한다.

가볍게 휘몰아치는 작은 혼돈을 품으며.


연극을 보고 근처를 걸었다. 조금 이른 저녁의 산책. 계단이 많았던 동네. 계단을 보면 계단을 걸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 꼭 호흡 같지. 올라간 양만큼 다시 내려오는 일.


재개발 추진 사랑방 옆으로 자이 아파트가 보이는 서울의 풍경. 골목에 둘러싸여 잘 찾기 힘들었던 학교와, 언덕 위에 지어져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던 학교가 길 하나를 두고 양쪽에 있었다. 두 학교에서 다니는 3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지 생각했다. 아이들이 마음에 쌓아둘 풍경이 얼마나 다른 것일지를.


여전히 축구장과 농구장을 보면 뛰고 싶어진다.


해가 기우는 방향으로 눈을 맞췄다. 서쪽으로 서면 예각이 되었고, 동쪽으로 서면 둔각이 되었다.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풍경을 모았다. 풍경을 수집하며 걷는 내내 한편에서 이태원을 떠올렸다. 애도하는 법을 몰라 그저 붙잡기만 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적은 이주란의 소설도 손에 들고 있었다. 이태원 사고를 참사로 고쳐 적었지만, 여전히 내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슬프다는 것과 슬퍼한다는 것의 차이 사이에서 어디로도 기울지 못해 한참을 서성이는 날들.


다만 이태원 역에 들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쓰인 몇 포스트잇을 보았을 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마음으로부터 슬픔은 출발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내가 언젠가 내뱉은 영혼의 입자가 가닿았을 한 명의 사람. 그에게 내가 건넬 수 있는 말이란 무엇일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진은영의 신작 시집을 쥐고 있는 요즘이다. 그 말을 찾기 위해서일까. 첫 시 「청혼」은 제목에서부터 오직 한 사람에게 바치는 시였다.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이라고 시인은 썼다. 시대의 아픔을 경유하는 시집이 인류가 아닌 단 한 명을 위한 헌사로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슬픔이 담겨 있다는 것. 아프게 와닿았다.


세 번째 시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를 가장 좋아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마찬가지로 한 명의 "당신" 고향집에 와서 그의 어린시절을 하나하나 그려본다.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거라 말하면서. 이는 사랑하는 이의 유년을 빈틈없이 기어 다니고 싶다는 뭉클한 고백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대상의 표면을 더듬어보겠다는 시인의 사랑의 태도가 이곳에 있다. 단원고 2학년 예은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편들 역시 그러한 태도로부터 쓰일 수 있었을 것이다.  명 분의 사랑. 한 명 분의 슬픔.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슬퍼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을 들이마시고, 슬픔을 내뱉는다는 듯.


달팽이가 당신의 모든 면적에 전부 머물 수는 없다. 또한 직접 그 당신이 될 수도 없다. 다만 시집을 읽다 보면 진은영이 풀어놓은 달팽이의 진득하고 끈질긴 최선을 믿게 될 뿐이다. 시 「아빠」에서 시인은 시를 대하는 마음을 이렇게 다짐한다. "진실이여, 너에게 주고 싶다 /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 은유의 살갗을". 몸으로부터 자꾸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은유의 한계 앞에서, 몸이 될 수는 없어도 몸과 붙어있는 언어를 쓰겠다는 시인의 절박한 각오. 그렇게 그가 달팽이의 몸을 빌려 쓴 시편들은, 서글프게도 지금 이곳 참사의 한복판에 정확히 떨어져 우리를 만져준다. 달팽이의 끈끈함으로, 성실함으로.


나는 여전히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서녘의 과 오래된 간판의 부르튼 얼굴, 운동장에 떨어진 남색 글러브, 물들어가는 나뭇잎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모양, 오랜 여행을 마치고 널브러진 과일 가게의 과일들, 그리고 낮달… 이런 것들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 지치지 않고 꼼꼼하게 내게 주어진 세계를 사랑해야지.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말하며 살아야지. 그것이 지금 내게는 숨을 쉬는 방법, 그리고 애도하는 방법인 것 같다. 바람이 얼굴에 닿는 감촉을 느끼며 걷는다. 조금은 뛰고 싶다고도 생각하면서.


언젠가 숲과 수프를 동시에 발음하며, 내 안의 작은 숲을 끓여 한 접시의 수프를 내어 놓을 것이다. 내 앞에 앉은 한 사람이 후후 쉬며 따뜻하고 슬픈 계절을 지나 보낼 수 있도록. 가을가을하고 마음마음한 나날에 그런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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