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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Mar 20. 2023

갈등의 모양

중학교 때였나, 학교 수업 시간에 '갈등'에 관해 배우던 게 기억난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혀 풀리지 못하는 상태가 갈등이라고 했다. 그 뒤로 학교나 아파트 등나무 정자 위에 넝쿨이 얽혀 있는 모습을 볼 때면 그 단어를 떠올렸다. 이게 갈등이라는 거구나. 그때 넝쿨 사이로 들어온 햇볕은 보도블록 위에 빛방울을 새겼다. 나는 차라리 그걸 보는 게 더 좋았다.


영화든 소설이든 이야기를 보거나 읽을 때 갈등은 빠지지 않는 요소였다. 역시 중학교 때 배웠던 이야기의 구성단계에 따르면 이 갈등은 곧 해결될 것이 분명한데도, 인물 간의 갈등이 나오면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특히 갈등이 폭발하는 절정 단계의 모습은 보기 버거웠다. 갈등 없이, 굴곡 없이 살 수는 없는 건가. 그때 나는 그런 가능성을 점쳐보곤 했다. 모든 갈등이 소거된 해피엔딩에 안정을 느끼면서.


고등학교 때 본 <노트북>의 엔딩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그들은 행복하게 살다 한날한시에 함께 죽었습니다.' 더 이상 상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완벽하게 닫힌 해피엔딩. 역시 누군가는 이런 걸 꿈꾸고 있었네. 하지만 막상 그렇게 보게 된 엔딩은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행복한 모습을 보기만 해도 마음 한 편이 불안해진다. 그 시간은 반드시 끝이 나고 곧 갈등의 시간이 올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나의 행복에 가지고 있는 태도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일상의 행복을 과거형으로 바라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행복은 꼭 그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우리를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그렇듯 행복 역시 흘러가는 구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삶의 풍경 앞에서, 행복을 붙잡으려 애쓰기보다 갈등을 끌어안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노아 바움백의 넷플릭스 영화 <결혼 이야기>는 부부였던 니콜(스칼렛 조한슨)과 찰리(아담 드라이버)의 이혼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이미 갈등이 쌓일 대로 쌓인 관계에서 시작한 이야기. 그러니 러닝 타임 내내 갈등상태에 놓인 영화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나를 얼마나 심약하게 만들었는지는… 굳이 더 말하지 않겠다. 특히나 두 사람이 LA와 뉴욕이라는 거처를 사이에 두고 갈등이 폭발하는 후반부 장면은, 이 글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났을 정도로 내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결혼 이야기>에서 행복은 늘 과거에 있다. 영화는 니콜과 찰리가 서로의 장점을 적은 글을 각자의 목소리로 읽는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한다. 그때 영화는 문장에 어울리는 두 사람의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하지만 장면이 끝나고 이혼 상담 중에 있던 니콜은 그 글을 읽기를 거부한다. 앞서 들리던 니콜과 찰리의 내레이션은 현재진행형이 아니었다. 행복은 그들이 서로에게 적은 문장의 형태로 과거에 붙박여 있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영화 내내 파란만장한 갈등을 겪으며 이혼에 합의한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조금 시간이 지나 찰리가 아들 헨리(아지 로버트슨)를 만나러 니콜의 LA 집을 방문한다. 찰리는 헨리가 방에서 어떤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들의 읽기 연습을 도와주기 위해 그 글을 들여다본다. 영화 시작 장면에서 니콜이 찰리의 장점을 나열하며 읊었던 문장들이 그곳에 있다. 뒤늦게 니콜이 아닌, 헨리와 자신의 목소리로 니콜의 문장을 읽게 된 찰리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영화를 처음 보던 날 나는 이 순간부터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꺽꺽 울었다. 스스로가 의아할 정도로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이미 멀어져 버린, 헨리를 안고 걸어가는 찰리의 뒷모습처럼 지금도 실시간으로 멀어지고 있는 좋았던 시절이, 현재와 공명하고 있다는 걸 <결혼 이야기>의 엔딩은 말해주고 있었다. 찰리와 니콜의 얼굴은 적어도 후회가 아니었다. 후회에는 과거를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있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고 있는 이들은 후회하지 못한다. 언젠가 그 시절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견딜 수밖에. 진흙탕 싸움으로 점철된 시간을 겪고도 두 사람은 그들의 '결혼 이야기'를 통째로 긍정하고, 온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이 '이혼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 이야기'라는 걸 곱씹어 본다. 이혼을 하는 과정마저도 결혼의 시간에 속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 삶 전체로 확장해보고 싶다. 아무리 우리 일상이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갈등 이야기가 아닌 인생 이야기를 살고 있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란 그런 거라고.






아빠가 돌아가신 지 9개월이 넘었다. 아빠가 살아있을 때도 당신에게 항상 힐난을 퍼붓던 엄마는 지금도 내 앞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곤 한다. 아빠가 워낙 먹는 걸 안 좋은 것만 먹잖아, 운동은 하나도 안 하고, 그러니 당뇨가 걸리지, 그게 어릴 때부터 그렇게 먹어 버릇해서 그래…… 수백 번도 더 들은 이야기들. 무수한 레퍼토리. 엄마의 결혼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중학교 때 나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하기를 바랐었다. 그게 엄마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겼다. 엄마와 아빠의 관계는 늘 갈등뿐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빠는 지난 10년 동안 일주일에 3번씩 투석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아빠를 돌본 것은 보통 엄마였으니, 나는 아빠가 돌아가시며 엄마가 돌봄 노동에서 벗어난 것을 안심했다. 물론 엄마 역시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없어져 편해졌다 말한다. 그래도 엄마는 아빠가 없어진 일상의 빈틈을 종종 공허하게 느끼는 것 같다. "하루가 참 길어." 엄마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물론 엄마는 당신만의 방법을 찾아갈 테지만. 이제는 아빠를 돌보던 것, 아빠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던 것, 아빠 대신 가장 역할을 하던 것 그 모두가, 그 시간 동안 엄마의 삶이기도 했다는 아이러니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떤 갈등은 얽혀있는 상태로 사람을 살아가게 하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에게 아빠와의 결혼 이야기는 역경의 연속이었겠지만, 그게 동시에 엄마를 지탱시키기도 했겠구나. 만약 학창 시절 때 보던 등나무 위의 넝쿨을 꼬인 이어폰 줄을 풀 듯 모두 풀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줄기들은 땅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얽혀 있는 모양 자체가 현재를 버티게 만드는 근육이었던 것이다.


여전히 나는 행복을 믿지 않는다. 행복을 바라지만,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만드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나를 견뎌가게 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등나무의 넝쿨을 올려다보고 싶다. 그러면 넝쿨 사이로 들어오는 빛과, 서로를 감싸고 있는 넝쿨의 그림자가 사실은 하나라는 게 보일 것 같다. 갈등의 모양이란 그런 것이라고 풍경이 내게 말해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더 많은 걸 배워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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