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치 디스패치>는 익히 알려진대로 잡지 『뉴요커』를 향한 웨스 앤더슨의 애정이 듬뿍 담긴 영화다. 학창 시절부터 수백권의 과월호를 모았다고 하니 이렇게 강박적인 사람은 역시 뭔가를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구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얼마 전에 영화 <아네트>를 보고 나서 하늘의 구름을 보며 생경한 아름다움을 전해 받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부터는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게 될 것 같다.) 시야에 다 담을 수 없게 펼쳐진 하늘에서 시시각각 모양을 바꿔가며 흐르는 구름은, 극장이란 암실에서 한정된 프레임에 담긴 영화와는 반대에 위치한 아름다움 같았다. 극장의 영화가 극장 밖 내가 속한 세상을 더 풍요롭게 느끼게 해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
그런데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면서는 오히려 그날 하늘을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웨스 앤더슨의 다른 영화를 볼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는 유독 그가 애정을 담아 가공하고 편집한 세계에 온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웨스 앤더슨의 취향이 다시 한번 집대성 되어 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세트장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주제에 맞게 잡지 형식의 미장센을 선보이며, 연극·애니메이션 등 다른 예술 분과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실시간 중계를 위한 모니터 영상이나 라디오 등 이야기 내부에서 사용된 매체 역시 다양하다. 소재로 쓰인 미술이나 음식, 무엇보다 잡지까지도 웨스 앤더슨은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들어낸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제조해낸 세상이 직접 만지고, 보고, 겪는 세상보다 아름답다고 진지하게 믿을 것만 같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이분법 자체를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영화를 보고 나면 주로 영화 바깥의 세상을 더 믿게 되는 사람인데. 웨스 앤더슨은 그런 내게 말해주는 것 같다. 영화 속 세상도 같은 세상이야. 아름다움에 우위를 둘 필요는 없어. 그의 영화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 스포일러가 있어요
웨스 앤더슨의 무용한 아름다움. 혹은 아름다운 무용함일까. 이를 테면 이런 것. 영화의 마지막 테마 에피소드의 애니메이션 시퀀스에서, 경찰서장이 탄 차가 납치 차량을 추격한다. 그때 앞서던 차가 갈림길에서 벽에 머리를 들이받는다. 차 보닛에 찰싹 붙어있던 근육질의 남자가 반작용으로 벽을 뚫으며 떨어진다. 납치범의 차는 우회전해서 계속 도망친다. 그리고 몇 십초의 시간 동안 다채로운 추격 씬이 이어진다. 곧 두 자동차가 조금 전의 갈림길로 돌아온다. 근육질 남자가 앞선 차에 똑같이 달라붙는다. 그 순간 영화는 몇 십초 전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와 완전히 동일한 이미지로 복귀한다. 곧바로 두 자동차는 좌회전한다. 다시 말해, 우회전에서 다시 돌아와 좌회전을 하기까지 - 동일한 두 이미지로 겹쳐지기까지 장면들- 은 아주 깔끔하게, 필름을 잘라내 없애버려도 무방한 씬이다. 물론 웨스 앤더슨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찬란함은 이런 수많은 우회전에서 온다. 나는 그게 너무 사랑스럽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좋아하는 장면 하나. 감옥에 갇힌 미스터 구스타브(랄프 파인즈)를 위해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사식으로 넣어준 멘델스 케이크를 간수장이 검사하는 장면이다. 다른 음식은 칼로 푹푹 자르면서 안에 뭘 숨겨두진 않았나 검사하던 그는, 너무 아름다운 멘델스 케이크를 보고는 손을 대지 못한다. 그 안에는 구스타브의 탈옥을 도와주는 도구가 들어있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아름다움’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이런 개똥철학이 심지어 영화의 ‘서사’를 진행시키는 핵심 요소가 된다는 건 진짜 엄근진한 능청 아닌가.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마찬가지다. 체스 게임으로 협상 테이블이 차려지고, 납치범들에게 요리사를 보내며 진압 계획을 세우는 재밌는 세계. 나는 웨스 앤더슨의 서사가 전혀 부실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는 너무도 타당한 핍진성이다.
이어서 말해보자. 자기가 독을 넣은 무 요리로 사람들 다 죽여놓고 지도 죽게 생긴 셰프 네스카피에(스티브 박).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서 무 요리가 얼마나 풍미가 좋았는지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웨스 앤더슨은 그 말을 꼭 해야 하는 거다. 편집장 아서 하위처(빌 머리)가 죽은 것도 모르고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 들고 편집장실로 들어오는 신입. 새저랙 기자(오언 윌슨)는 그에게 편집장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케이크를 본다. “그거 하나 줘봐.” 그러니까 편집장이 죽었든 말든 일단 케이크는 먹고 봐야 하는 거다. 아무리 혁명을 이끄는 대장들이라도, 최루탄이 날라오는 상황에서 도망쳐서라도 사랑은 나누고 봐야 하는 거다. 왜? 진심이라서. 웨스 앤더슨 영화는 아름다움은 언제나 진심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 영화다. 사람을 죽인 무 요리도, 죽은 사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케이크도 그에게는 다 진심으로 빚은 아름다움이다.
편집장 하위처는 정해진 분량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써온 기사를 짜르기는 커녕 보기 드문 좋은 기사라고 칭찬한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배우들은 어느정도 정해진 톤 안에서 연기를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거짓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온통 허구로 이루어진 영화에서 이건 재밌는 질문이다. 미술상 카다지오(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로젠탈러(베니시오 델 토로)에게 폭언을 퍼붓지만 그건 그가 돈에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로젠탈러의 작품을 끝내 휴게실 째로 떼어내 아름다움에게 거처를 만들어주기에 이른다. 누른베르거(프랜시스 맥도먼드) 기자는 제피렐리(티모시 샬라메)와 잠자리를 나누고도, 제피렐리의 어머니에게 그와 함께 있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제피렐리 역시 줄리엣(리나 쿠드리)에게 누른베르거와의 섹스 경험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로젠탈러와 시몬(레아 세이두)의 가감없는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세계에서는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너무 당연하단듯 진실만을 말한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이런 거짓 없는 언어에 늘 예기치 못하게 마음을 관통 당한다. 무조건 기자들을 지킬 거라는 하위처의 말. 어떠한 결연도 느껴지지 않는, 그 건조한 웨스 앤더슨 식 톤이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강한 진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거짓의 세계이기에 역설적으로 또렷해지는 진심이 그의 영화에는 있다. '눈물 금지'라는 편집장실의 표어가 눈물의 투명을 강조하듯.
또한 웨스 앤더슨의 진심은 디테일에서 나온다. 『프렌치 디스패치』 마지막 호의 첫 기사는 (가상 배경인 도시) 블라제를 소개하는 새저랙 기자의 단신 기사다. 그는 블라제의 골목골목을 누빈다. 그렇게 도시의 구석구석,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구체적인 모습을 직조해낸 뒤에야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비행기나 자동차의 단면을 보여주듯 특정 상황을 정지시킨 채 순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특유의 연출도 그렇다. 학생 혁명군과 시장이 체스 게임을 하는 씬의 연출처럼 ‘과정’을 보여주는 것에 몰두하는 웨스 앤더슨 영화의 특성은, <프렌치 디스패치> 자체가 잡지 한 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걸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뉴요커』스타일의 『프렌치 디스패치』 표지로 장식한 엔딩 크레딧은 디테일, 헌사, 덕질을 한 데 모은 완벽한 마무리였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뉴요커 스타일의 엔딩 크레딧. 지금은 작년 하늘나라로 간 장 자끄 상뻬가 생각나서 더 울컥한다.
또 하나 더 짚어볼 것.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지멋대로 우회전을 했으면서, 다시 갈림길로 천연덕스럽게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좌회전을 한다. 이야기는 원래 그랬다는 듯 뻔뻔하게 진행된다. “책갈피를 어디 꽂았는지 기억하고 계시죠?” 세번째 테마 에피소드에서 한창 다른 얘기를 하던 기자 로벅 라이트(제프리 라이트)에게 방송 진행자는 묻는다. “그럼요” 로벅 라이트는 대답하고 원래 하던 얘기를 스무스하게 이어간다. 궁극적으로 <프렌치 디스패치>의 아름다움은 이야기에 있다(<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너무나도 그랬듯). 왜 그의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내게 스며드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강박적이고 인공적으로 세공된 이야기를 나는 왜 어느 순간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끼는지. 나는 웨스 앤더슨 영화를 보기 전에 울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로얄 테넌바움>을 보면서도, <다즐링 주식회사>, <그부페>, 그리고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면서도 슬쩍슬쩍 울었다.
영화가 모두 끝나고 나는 이 세계를 떠나기 싫었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 속에 더 오래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생각이 든다. 웨스 앤더슨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끝이 있다는 것. 아마도 그래서 나는 그의 이야기에 더 오래 멈춰있고 싶은 것 같다. 이건 풍경처럼 지나가는 이야기니까. 그간 웨스 앤더슨이 그려온 많은 이야기는 과거를 배경으로 하거나,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이야기, 혹은 결국 과거가 되어버리는 이야기였다. 샘과 수지의 모험은 끝이 나고(문라이즈 킹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완전히 쇠락했으며(그부페), 가세가 기운 70년대 가상의 뉴욕, 천재로 태어난 자식들은 죄다 망가졌고(로얄 테넌바움), 엄마의 부재 아래서 결핍을 가졌던 형제들은 엄마를 찾아 인도까지 온다(다즐링 주식회사).
언젠가 과거가 되어버리는 아름다움에는 걷잡을 수 없는 향수가 깃든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애초에 하위처의 죽음으로 시작한 영화였다.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제피렐리는 죽고, 그의 이미지는 훗날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소비된다. 그는 전설이 된다. 그 순간 이 에피소드 전체가 한 장의 전설로 남은 남자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부페>에 영감을 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제목 『어제의 세계』처럼 웨스 앤더슨은 이미 지나가버린 세계를 부유하는 작가 같다. 그곳에는 어쩔 수 없는 짙은 그리움이 있다. 그는 그 세계를 다시 현재로 끌어와 부활시킬 생각이 없다. 단지 자신이 사랑했던 세계를 자신이 사랑하는 모습대로 비추어내는 낭만주의자에 가깝다.
잡지라는 구매체와 잡지에 매달리는 기자라는 글쟁이들. 극장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이 시점에 극장에서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는 경험은 정말 시대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기분을 준다. 자본의 틈바구니에서 이토록 강한 존재감을 내보이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만을 내보인 감독. 아름다운 마침표의 영화를 만드는 웨스 앤더슨이지만, 나는 그의 영화 만들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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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 앤더슨이 여성이나 유색인종을 다루는 방식은 아직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옹호한다거나 비판한다거나 어떤 입장도 충분치 않다는 느낌. 웨스 앤더슨이 이러한 지적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도 모르지 않고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고도 느낀다. 오히려 그는 그런 인식의 결핍을 가감없이 내보이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근데도 <문라이즈 킹덤>은 다시 보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의 결핍 있는 남성 인물들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즐기며 영화를 볼 수 있기에 더 웨스 엔더슨에게 끌리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