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찬 Aug 03. 2023

망막이 손상되어도 괜찮은 일

웨스 앤더슨,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

※ 스포일러가 있어요


TV 속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1막 막바지에는 우리를 아주 당황스럽게 만드는 광경이 나온다. 갑작스레 등장한 외계 생명체가 오천 년 전 지구에 떨어진 축구공만 한 소행성을 가지고 유유히 떠나는 장면이다. 마냥 멀뚱히 지켜볼 수밖에 없던 이 상황을 제외하고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를 조금만 되감아 그보다 앞선 장면을 우선 말해보고 싶다.


외계 생명체가 출몰했던 날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방문한 모든 사람이 '행성의 궤도'를 관찰하기 위해 히켄루퍼 박사(틸다 스윈튼)의 주도 아래 소행성 지점에 모인 밤이다. 방문객들은 저마다 굴절 상자를 지참하고 있다. 히켄루퍼 박사는 그들에게 행성을 직접 바라보면 망막이 손상될 수 있으니, 반드시 굴절 상자를 써야 한다고 주의를 준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저는 12살 때부터 망막이 손상되기 시작했어요." 전형적인 웨스 앤더슨 식 블랙코미디 대사다. 그러니까 박사는 12살 때 맨눈으로 행성을 바라봤던 호기심 많은 아이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는 덧붙인다. "그때부터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갑자기 이야기가 샜네요." 이 두 문장을 들었을 때 순간 마음이 달아올랐다.


박사의 말은 기본적으로 행성을 직접 쳐다보지 말라는 경고다. 하지만 이어진 말이 행성을 직접 쳐다봤기에 자신이 천문학자라는 꿈을 꿀 수 있었다는 고백으로 들릴 때, 나는 이것을 웨스 앤더슨이 영화에게 하는 말로 멋대로 번역해 버렸다. 빛을 굴절시켜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굴절 상자라는 사물은 꼭 카메라 옵스큐라를 닮았다. 자연스레 상자 안에서 사람들이 행성의 상을 보는 일은 우리가 숨죽이고 나만의 암실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행위와 겹친다. 어두운 상자 속으로 보이던, 세 개의 점으로 나타난 행성의 궤적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곳에 예상치 못한 네 번째 점이 찍힐 때, 아이는 상자를 벗어야만 한다. 이것이 꼭 영화를 통해 바라보던 세상을, 나의 맨눈으로 바라보고 싶다는 욕망처럼 느껴졌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12살의 히켄루퍼는 상자를 벗고 고개를 치켜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는 평생 망막이 손상되어 가는 걸 감수할 수 있을 만한 꿈이 생겼을 것이다. 장소에 모인 사람 중 가장 먼저 상자를 벗었던 우드로(제이크 라이언)가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이것은 세상을 담아내기 위해 영화를 찍는 이가 아닌, 사랑하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말하고 싶어졌던 이가 전할 수 있는 이야기다. 웨스 앤더슨은 이번 영화를 통해 비로소 자기가 그런 작가였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다음 말. "갑자기 이야기가 샜네요." 박사는 천연덕스레 덧붙였지만, 앞선 두 문장은 박사가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너무 적절하게 그의 삶을 요약해 낸 말들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히켄루크의 입을 통해 그 문장들에 '쓸데없음'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이렇게 어느새 다른 방향으로 새어 나가는 이야기야말로 웨스 앤더슨의 영화를 설명하는 가장 멋진 특성일 것이다. 그런 무의미한 말 안에는 인물들이 세계를 대하는 제스처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소개하는 영화 초반부, 경로 계산 오류로 무기한 폐쇄되었다는 다리가 나온다. 아무런 효용도 남지 않은 다리가 그곳에서 발산하는 뉘앙스는 무의미가 의미의 다른 말일 수 있다는 역설이다.






외계 생명체가 소행성을 가져간 이후 우드로는 고뇌하기 시작한다. 원래 성공회 신자로서 신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그는, 눈앞에서 목격한 외계 생명체의 존재가 자신의 세계를 깨뜨렸음을 깨닫는다. 다시 몇 주가 지나, 외계 생명체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 소행성을 돌려놓는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전 이제 신을 안 믿어요." 우드로는 말했다. 다이애나와의 사랑은, 그런 그가 뛰어들기로 결심한 새로운 미지이자 확신이었을 테다. 그러나 웨스 앤더슨 세계의 모든 어른이 그런 것처럼 언젠가 우드로 역시 사랑마저 확신할 수 없는 어른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평생에 걸쳐 망막을 잃어가며 그는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갈팡질팡'으로 꿈을 꾸며 살아가겠지.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는 이례적으로 연극이라는 형식을 도입한다. 온갖 예술 분과를 활용해 액자 형식을 구현해 오면서도 그의 영화에서 극중 인물이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미 공고해진 웨스 앤더슨의 연출적, 미술적 인장은 그의 영화 속 이야기가 가짜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전달해 왔지만, 그는 오히려 능청스러움을 발휘하며 그 이야기가 진짜인 체하려 애쓴 작가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미국 wXYZ 채널에서 방영되는 방송용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창작 과정과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담은 이야기라고 공표하며, 웨스 앤더슨은 처음부터 이 이야기 전체가 가짜임을 밝힌다. 이건 그의 영화에서 처음 보는 시도다.






여기서 주목해 볼 인물은 제이슨 슈워츠먼이 연기한 오기 스틴백, 혹은 그를 연기한 배우 존스 홀이다. 오기는 연극 속에서 종군 사진기자로 등장한다. 그를 연기한 존스는 1막 5장이 끝나고,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극작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이 첫 만남에서부터 존스는 그가 이미 연극과 연극 바깥을 오가는 존재임을 알린다. 이전 연극에서 소품으로 쓰였던 군복을 입고 등장한 그는, 곧바로 그것이 소품'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며 그가 말 그대로 배역을 '입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소품이었던 군복이 그대로 그의 옷이 되어버린 것이다. 뒤이어 존스는 말한다. "오기는 왜 전기 배너에 손을 넣는 거죠?" 존스는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덧붙이지만, 극을 쓴 콘래드조차 모르겠다고 말할 뿐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이 씬에서 존스는 갑자기 창문을 주먹으로 깨뜨리는데, 그가 영화 후반부 연극을 깨고 나오는 존재가 된다는 걸 봤을 때 이 행위는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하지만 그가 왜 창문을 깬 것인지,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리고 오기는 연극 후반부 정말로 전기 배너에 손을 넣는다. 이번에는 창문 건너편의 밋지(스칼렛 요한슨)가 묻는다. "왜 그런 거죠?" 오기는 콘래드의 답을 반복한다. "확실치 않아요." 얼마 후 외계 생명체가 다시 나타난다. 사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은연중에 선과 악이 분명했던(실은 그렇게 강요당했던) 시대를 드러낸다. 공산주의 색출 광풍이 불었던 1950년대를 배경으로 국가의 권위를 내세우던 냉전 시대 미국과 매카시즘을 영화 내내 풍자한다. 하지만 외계 생명체의 등장은 이러한 확신의 세계가 실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기반 아래 있었음을 폭로한다. 그러니 배역인 오기가 배우인 존스가 '되어' 무대 밖으로 뛰쳐나간 시점이, 외계 생명체가 재차 모습을 드러낸 밤의 난장판이었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무대 밖으로 나간 존스는 연극의 연출자 슈버트 그린(에이드리언 브로디)에게 가 털어놓는다. 그가 영화에서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 "지금도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요." "내 연기 해석이 맞나요?" "뭔가 답이 있어야 하잖아요." 연출자 그린은 (웨스 앤더슨이 썼다고는 믿기 힘든) 직접적인 위로를 건넨다. "그렇게 하면 돼. 잘하고 있어."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공간적 특성을 체화한 존스의 혼란스러움을 그린은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그 헷갈림이 너를 존재하게 한다는 듯이.



그리고 그는 신비로운 말을 더한다. "자네가 오기가 아니라 오기가 자네가 된 것 같아." 이 말을 풀어 보자면 '존스가 오기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기라는 캐릭터가 극을 뛰쳐나와 존스가 된 것만 같다'는 뜻. 웨스 앤더슨은 이렇게 영화와 현실의 위치를 뒤바꾼다. '배역이 우선한 뒤 그가 연극 밖으로 나와 배우가 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굴절 상자를 통해 보는 것을 뒤집어, 굴절 상자를 보다 보니 세상을 직시하고픈 욕망을 느낄 수도 있다는 이야기. 내게 이것은 아주 진부하게도, (현실보다 영화를 사랑했지만) 영화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영화를 통해서 세상을 알고 싶어졌었다고 고백하는 말처럼 들린다. 자신이 너무 사랑했던 지나간 세계를 그리던 웨스 앤더슨이, 이번 영화에 이르러 그 세계를 통과해 현실을 만져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문을 박차고 나와 현실과 공명한다. 연극의 문을 열고 나온 존스가 (그린의 말에도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이번에는 바람을 쐬기 위해 바깥으로 나간다. 연극 세계나 무대 뒤편, 혹은 연극을 준비하던 과정의 워크숍 등 영화 속 모든 장소는 실내였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바람이 부는 '바깥'이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불확실한 곳. 우드로는 건너편 발코니의 한 사람을 마주한다. 그는 연극 중 오기의 아내이자 우드로의 엄마를 연기한 배우(마고 로비)다. 배역 이름조차 나오지 않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배우.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그곳에 있다.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우드로의 엄마는 이미 오기네 가족이 도시에 도착하기 3주 전에 죽었다. 배우는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딱 한 번, 그마저도 리허설에서만 나온다. 아내가 죽기 직전 남편 오기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 그마저도 오기의 회상 속인 - 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본 연극에서는 삭제되었고, 배우는 연극에 아예 등장조차 하지 못한다. 마고 로비가 분한 배우는 오기 역의 존스를 건너편에 두고 리허설의 장면을 하나하나 읊어낸다.



"우린 꿈속에서 만났어요." 리허설의 장면이 오기의 회상 속이었다는 것을 되살리듯 배우는 말한다. 하지만 실은 꿈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는 영화에게 우리는 많은 안심을 받아 오지 않았나. 독백도, 대화도, 낭독도 아닌 그의 신비로운 말들은 이상한 위안이 되어 존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안착한다. "우드로도 그래 크면 달라지겠지."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우드로에게 이런 말을 해주던 사람은 없었다. 이름 없는 배우의 다정함은 자연스레 우드로와 오기에게 분명 존재했던 사랑을 일깨워 준다.


"그래도 노력을 좀 해봐." 배우가 오기에게 하는 말은 꼭 조금 전 연출자 그린이 존스에게 했던 말을 닮았다. 하지만 이것이 배역인 오기를 거쳐 존스에게 도착했을 때라야 그는 그 말이 마침내 와닿았을 것이다. 참 이상하지. 관객이 허구의 세계에게 평안을 얻는 건 늘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곧 두 사람은 오기가 아내의 사진을 찍기 직전 마지막 대화를 재현한다. 그리고는 아내의 사진이 네거티브 필름으로 등장하고, 곧바로 반전된다. 꼭 영화와 현실이 서로를 바깥에 두고 있는 것만 같다. 동시에 발코니에 선 두 사람을 담아내는 장면이 그러하듯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마주본다. 이때 두 사람 사이의 시각적 거리감은 연극 속 오기와 밋지의 거리와 같다. 손을 뻗으면 닿지 않지만, 서로의 음성과 표정을 공유하는 그 거리는 웨스 앤더슨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인 것만 같다.


이 순간 존스인 건지 오기인 건지 모를 남자는 이미 연극 안에 존재하고 있던 아내의 사진을 새롭게 떠올렸을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실제로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연극/영화의 스태프겠지만) 오기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다. 존스는 정말 연극 '바깥'에 있는, 그러니 연극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지워진 배우'에게 위로를 얻는다.


종종 웨스 앤더슨은 배우의 '눈'은 어떠한 연기나 배역으로 가릴 수 없는 사물이라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마고 로비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여줄 때 관객이 보는 것은 그의 눈이고, 그 눈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오롯이 그곳에서 우리를 본다. 우리 삶의 등장인물이 될 수 없는 영화는 관객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웨스 앤더슨 영화의 정면 클로즈업이 아름다운 이유일까. 그 순간 객석 건너편의 영화를 맞대하며 우리는 동등하게 시선을 나눈다. 웨스 앤더슨의 강박적인 대칭 구도는 오기와 밋지의 수평, 존스와 아내 역 배우의 수평처럼 공평한 시선을 입을 때 끝내 마음을 움직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내게 굴절 상자의 역설이다. '영화가 끝나면 현실을 살아야지'가 아닌 '영화를 보지 않으면 현실을 살아갈 수 없다' 말하는 못 말리는 덕후의 자기 암시. 더 나아가 영화는 꿈처럼 사라진 자리에서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1막이 모두 끝나고 중간휴식 시간, 연출가 그린의 아내 폴리(홍 차우)가 그린을 찾아온다. 그린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던 폴리는 마지막에 말한다. "3장 5장에서 밋지에게 문을 닫고 대사를 치라고 해". 하지만 존스가 연극 밖으로 나와 발코니를 다녀오는 사이 3막 5장은 지나가버린다(존스는 자기 대사를 놓쳤을 것이다). 웨스 앤더슨은 폴리의 대사를 통해 3막 5장의 부재를 미리 장난스럽게 알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밋지는 정말 문을 닫고 대사를 쳤을까? 영화가 끝나고 궁금해졌다. 하지만 역시 밋지는 문을 닫지 않았을 거라 답할 수밖에 없었다. 밋지가 열어놓은 틈으로 이야기는 우리도 모르게 영화 밖으로 새어 나왔을 것이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책갈피의 아름다움, 다시 이어지는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