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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Dec 14. 2023

다큐멘터리의 재현이 영화가 될 때

이광재, <거리의 가능한 불행들>

영화는 가족들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받던 부모의 얼굴이 20년 전 기억을 소환하는 아들의 질문에 어두워진다. 그 사건이 있고 지금까지 인천은 가본 적도 없다는 아버지에게 이광재 감독은 지도를 가져다 댄다. 사고의 발생 지점을 미시적으로 짚어보려는 그의 시도는 오랜 결심을 마친 사람처럼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다. 곧 한 명의 인터뷰이가 더 등장한다. 그건 다름 아닌 감독의 형이다.


20년 전 이광재 감독은 인천의 한 골목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 큰 아버지의 닭갈비집 개업일, 자리가 지루해졌던 형제는 잠시 가게를 빠져나와 길 건너편의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겨우 몇 걸음이면 건너는 좁은 도로였다. 형이 먼저 건넜고, 동생은 건너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인천의 응급실에서 제대로 된 조치를 받지 못한 둘째 아들은 서울의 병원으로 이동했고, 그동안 구급차 안에서 어머니는 생사를 오가는 아들의 곁을 지켰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은 자신의 시점에서 기억을 복기한다. 가장 죄책감에 시달렸을 형에게 그날은 사진 몇 장처럼 파편적으로 남겨졌다.


그러는 동안 영화에는 불편한 긴장이 생긴다. 그건 감독이 인터뷰어로 나선 탓에 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뇌가 크게 다친 사고를 겪은 그의 현재 겉모습은 어떨까? 영화의 2/3가 지나는 동안 나는 이런 거북한 질문을 떨쳐내지 못해 괴로웠다. 물론 그게 영화를 계속 보게 만드는 동력이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인터뷰어가 직접 카메라를 들었을 때, 그는 화면에 등장할 수 없다. 이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감독이 형과 함께 인천에 찾아가던 날, 이광재 감독은 지하철 좌석에 앉은 채로 화면에 아무렇지 않게 나타난다. 그때 카메라는 반대편 좌석에서 형제를 찍고 있다. 카메라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졌다.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이광재 감독은 가장 결정적인 하루 동안 스스로 대상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러면서 감독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앞서 관객인 내 마음 안에 생겨났던, 동생의 외형을 둘러싼 꺼림칙한 서스펜스는 손쉽게 무화된다.


뺑소니 사고 이후 20년 동안 이광재 감독은 수시로 분노했다. 대상이 사라진 분노는 갈 곳을 잃은 채 가족을 향하기도 했다. 그게 그가 가족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질문을 던졌던 이유일 것이다. 인터뷰 중 형 역시 아주 일상적인 일에 끓어올랐던 분노의 경험을 고백한다. 그건 한쪽이 고장 난 이어폰을 그냥 쓰면 된다고 대수롭지 않게 던지던 동생의 말 때문이었다. 그 말에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자기도 알 수 없었다던 형의 심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가늠해 보자면, 형은 동생의 말이 체념으로 번역되어 들렸을 것이다. 망가진 모양대로 살아도 상관없다는 듯한. 그러나 감독과 그의 형이 느꼈던 '분노'의 크기와 방향을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는 없다.


영화에는 두 번의 재현이 나온다. 첫 번째는 여러 객관적인 정보와 감독 자신의 기억으로 구성해 낸 애니메이션 인서트다. 그건 사건의 전말, 그러니까 그날이 무슨 날이었고, 왜 나와 형은 그때 길을 건넜고… 하는 정보를 통해 당시 사고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재현에는 서사가 부재한다. 서사란 그 사건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지금의 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되짚어보려는 시도에서 생겨난다. 그건 이광재 감독이 <거리의 가능한 불행들>을 찍은 과정이다.


감독은 반드시 사고 지점을 찾아가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아픔을 현재로 끌어올려 새롭게 서사화 시키는 작업이 그에게 필요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카메라를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타인(이해지 촬영감독)에게 맡긴다. 오롯이 내가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카메라를 든 1인칭이 아닌 카메라에 찍히는 3인칭으로 나를 마주할 때, '나'는 맥락이 되고 뱡향이 된다. 이광재 감독은 또한 그곳에 형을, 그러니까 '형'과 '나'가 아니라 '형과 나'를 담아내려 했을 것이다. 서사의 부피를 넓혀 그 안에 관계를 기입하려 했을 것이다.


20년 만에 찾아간 장소에는 빌라가 들어섰고, 닭갈비집은 사라졌다. 상가는 쇠락했다. 하지만 그때 그 도로는 그곳에 있다. 여기네, 여기야. 형제는 그때 닭갈비집 앞에 선다. 내가 먼저 이렇게 건넜지, 형은 되뇌며 몇 걸음을 뗀다. 도로 건너편에서 형은 동생을 돌아본다. 그리고 동생이 길을 건넌다. 20년 전에는 건너지 못했던 길을 그제야 걷는다. 그들은 그곳에 당시 사고를 '재현'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곳에 갔을 뿐이고, 재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나는 이 선후관계에 다큐멘터리의 기적이 숨어있다고 느낀다.


촬영감독은 갑작스레 터진 눈물을 훔치며 어색하게 서로를 껴안는 형제를 멀리서 찍는다. 그는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가지 못하고 멀리서 클로즈업한다. 그러니까 이건 관객의 눈이다. 동생과 형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유의 순간에 동참할 수는 없는 관객. 다만 더 가까이에서 그것을 목격하고픈 욕망이 클로즈업에 투영된다. 그리고 관객은 그 시선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회복의 서사로 받아들일 것이다. 최초의 관객이 되어 장면을 지켜보았을 이광재 감독의 마음을 상상한다.


다시 말하고 싶다. 이광재 감독은 그날 카메라를 촬영감독에게 맡겼다. 형제의 모습은 영화가, 서사가 되었다. 생각해 본다. 특정한 이야기와 사람을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아가, 다큐멘터리의 한 순간이 불현듯 영화가 될 때야말로, 다큐멘터리는 가장 순도 높은 찰나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거리의 가능한 불행들>이 치유의 영화가 될 수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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