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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Dec 17. 2023

'잃어버림'으로 존재하는 관객, 영화, 극장

김현정, <유령극>

문화극장에 방문한 할아버지와 손자가 영화를 본다. 길을 잃은 아이에게 숲에서 만난 군인이 묻는다. 너는 왜 여기 있니? 숨바꼭질하다가 길을 잃었어요. 또 무슨 대화가 오갔었지? 기억은 흐릿하다. 극장에서 나온 두 사람은 대화한다. 할아버지가 묻는다. 왜 같은 장면이 반복해서 나오는 거야? 어른이 된 주인공이 과거를 떠올리는 거잖아. 손자는 퉁명스럽게 덧붙인다. 할아버지는 뭘 본 거야?


성실한 관객은 되지 못하는 나는 <유령극>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장면 즈음에서 졸았던 것 같다. 눈을 뜨니 앞선 숲의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가 군인에게 묻는다. 왜 혼자 계세요?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미묘하게 달라진 대화. 어쩌면 군인은 길을 잃은 아이의 미래였을까. 영화는 끝이 났고, 몽롱한 정신으로 나는 나를 자책하며 극장을 나왔다. 대체 왜 나는 극장에서 자꾸 졸까?


그리고 오늘 이 영화를 운이 좋게 다시 한번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졸지 않았다. 한 장면도 놓치지 말아야지,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이렇게 뭐라도 적어보려는 지금, 나는 이 영화가 여전히 흐릿하다. 아이가 묻는 것 같다. 대체 뭘 본 거야? 영화에서 할아버지는 가만히 침묵했다. 아마도 이 문장 더미도 그런 침묵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첫 장면, 공간을 부유하는 시선이 있다. 아주 오래되어 투박해진 화면 안에서 그 시선은 낡은 공간을 유유히 떠다닌다. 곧 화면이 정지한다. TV 앞에서 할아버지가 화면을 보고 있다. 그 옆에서 이불속에 숨어 있던 아이는 묻는다. 나왔어? 아니 멈췄어. 할아버지는 비디오테이프를 꺼낸다. 비디오테이프는 완전히 고장 나 수명을 다했다. 두 사람은, 그리고 관객은 멈춘 장면의 다음 장면을 보지 못한다. 아이는 어쩌면 유령을 기다렸을까?


비디오테이프로 영화 보기에 실패한 두 사람은 극장을 향한다. 그런데 스크린에서 원주라는 지명이 보일 때, 우리는 앞선 비디오테이프 속 장소가 얼마 전 철거된 원주 아카데미 극장이었음을 눈치챈다. 그곳을 배회하던 시선이 사라짐을 앞둔 극장을 맴돌던 존재처럼 느껴지고, 그렇다면 지금 그 시선은 어디로 간 것인지 자연스레 묻게 된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문화극장으로 향한다. <유령극> 속 문화극장이 바로 원주 아카데미 극장이다. 여기는 매일 똑같은 영화만 틀어. 상영이 끝나고 아이는 불평한다. 그 영화란 극중극 <필연과 우연>이다. 다음에는 다른 극장을 가자는 아이의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아마도 다른 극장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는 늘 같은 영화관에 와서 같은 영화를 보는 극장의 유령 같은 관객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대체 뭘 본 거야?'라는 손자의 질문으로부터 <유령극>은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손자처럼 문장을 통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손쉽게 정리할 능력이 없는 할아버지의 기억이 필름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필름 편집기를 통해 필름을 자르고 붙인다. 영사기에 필름을 걸어 영화를 재생한다. 그렇게 새롭게 영사되는 <필연과 우연>은 과거와 미래가 뒤섞여있는 신비로운 감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숲에서 길을 잃은 것은 아이였을까, 군인이었을까. 그들이 마주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장면은 변주되고, 우리는 무엇이 <필연과 우연>의 진짜 버전인지 알지 못한다. 애초에 그런 건 없다는 것처럼. 영화는 시선으로 존재한다. '유령'은 바로 그 시선이 영화(靈化)한 존재와 다르지 않다.


앞서 손자는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할아버지 옆에서 그에게 자막을 직접 들려주었다. 숲 속에서 군인에게 숨바꼭질을 하자고 말하던 아이는, 군인에게 왔던 길을 꼭 기억해야 한다 당부한다. 그래야 돌아갈 수 있다며. 손자의 귀엣말은 헨젤과 그레텔이 흘려두었던 부스러기처럼 영화가 왔던 길을 되짚어 주는 것만 같다. 마침내 영화의 음성이 할아버지와 손자의 목소리-대화로 발화된다. 그때 우리는 관객을 입은 영화가 필름을 집으로 삼아 거주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유령이 시선을 영화(靈化)한 존재라면, 필름은 그 유령을 육화(肉化)한 존재.


<유령극>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관객이 있다. 그 관객에게 <필연과 우연>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는 내가 처음 <유령극>을 보았을 때처럼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사실 숨바꼭질을 둘러싼 아이의 마지막 말들은 어딘가 이상하다. 숨고 싶은 만큼 숨으면 되지만, 너무 오래 숨으면 안 되고, 꼭 돌아와야 하며, 그러기 위해 왔던 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어버리고, 사실 자기는 늘 길을 잃곤 한다고.


20대 초반, 영화관에 혼자 가던 나는 앞자리 가운데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영화를 마주 보아야 제대로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지금 나는 사이드 좌석에 앉아 비스듬히 영화를 본다. 이제는 영화를 몰래 훔쳐보는 보는 듯한 그 기운 자세가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그럴 때면 꼭 통로에 인장처럼 빛나는 비상구 표시가 보인다. 그 초록색 불빛이 나는 늘 이상했다. 극장은 내게 비상구 같은 곳인데, 저 화살표가 바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돌아와야 하지만 자기는 늘 길을 잃는다는 아이의 말은, 극장으로 숨어드는 관객이 반드시 그곳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는 위안처럼 들리기도 한다. 다만 숨바꼭질을 하며 그곳에서 미래와 과거를 마주할 수도 있다고. 그냥 유령이 되어달라고. 극장을 지켜달라고. <유령극>은 그런 면에서 원주 아카데미 극장의 사라진 자리를 증명하는, 유령이 되어버린 영화, '유령의 극'이기도 하다.


극장의 비상구 표시를 따라나가면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잠에서 깨어나고, 여전히 길을 잃은 채로, 극장에 앉아 있다. 영화는 다른 존재를 마주할 수 있는 신비로운 숨바꼭질. 불완전한 각자의 기억이 서로를 만난다. 나는 당신의 영화를 진술한다. 당신은 나의 영화를 진술한다. 극장은 그곳에 있다. 관객의 부스러기 같은 대화가 채워낸 빛의 통로가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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