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찬 Dec 31. 2023

아주 큰 것부터, 아주 작은 것까지

정다운, <땅에 쓰는 시>

1.

<땅에 쓰는 시>는 1세대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의 사계절과 다시 찾아온 봄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선유도 공원, 서울식물원 같은 대단위 공공 프로젝트와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 제주 오설록티뮤지엄, 디올 성수 등 굵직한 기업 프로젝트가 모두 선생님의 손에서 생명력을 얻었다. 선생님의 작업은 '조경'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경치를 꾸민다'라는 1차원적인 의미에 머물도록 하지 않는다. 거대한 구조를 바탕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끌고 식물 하나하나의 위치를 세심히 지정하며 자연의 뉘앙스를 인간의 삶과 조율시키는, 말 그대로 '아주 큰 것부터 아주 작은 것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 선생님의 일이었다.


대한민국 조경의 역사 자체인 선생님의 포트폴리오를 톺아보기만 해도 많은 영감이 되었을 텐데, 막상 영화가 뿌리로 삼고 있는 풍경은 선생님 본인이 살고 계신 앙평 주택의 정원을 손질하는 모습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영화는 양평정원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직접 호미를 들고 본인의 뜰을 살피는 선생님이 있다. 바로 그곳에 선생님이 조경을 대하는 태도의 기본이 있다.


눈이 두껍게 쌓인 겨울의 하루. 정원을 거닐던 선생님이 황금국수나무 앞에 선다. 오늘따라 이게 유독 예쁘다며 무릎 높이의 여린 가지 위에 얹힌 눈을 털어내던 선생님은 이렇게 덧붙인다. "겨울에 아름다워야 봄에도 아름답고, 여름에도 아름다워." 이 말을 듣는 순간 스크린 속 겨울의 풍경이 생경해졌다. 이파리가 모두 떨어진 겨울의 나무와 식물을 보며 내가 아름다움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를 스스로 되물었다. 내게 저 정원은 눈의 질감으로 아름다웠지, 나무의 형태로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무를 하나하나 만지며 예쁘다 말하던 선생님의 시선에는 가장 앙상한 곳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태도가 깃들어 있었다. <땅에 쓰는 시>는 내가 겨울을 대하는 시선을 아주 조금이라도 바꿔낼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 많은 눈이 내린 서울의 거리를 지나며 정영선 선생님을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인상 깊었던 것은 정영선 선생님의 걸음걸이와 속도였다. 조경가라면 유유자적하듯 천천히 걸을 것만 같았던 내 편협한 생각과는 다르게, 선생님은 참 빠르게 걸었고 작업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발길과 손길이 저렇게 다정다감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41년생으로 여전히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이신 선생님은 부지런히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최선을 다해 감탄했다. 내가 배우고 싶었던 건 그 치열함이었다. 하나의 풍경을 하나의 풍경으로 관조하는 게 아니라, 그 풍경을 이루고 있는 세부적인 요소들을 뜯고 만지며 감탄하는 자세. 전석지에 쌓인 돌 하나하나에 따라 전체적인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분석하며 "이건 내 교과서야"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2.

자신을 '연결사'라고 지칭하는 선생님은 조경에 관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닌 이미 가지고 있는 걸 잘 보존하며 그곳에 약간만 '덧대는' 것이라 말한다. 양평정원을 가꾸며 '어두우면 집에 들어오는 게 원칙'이라던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산과의 경계를 강조하며 정원을 만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바다는 바다대로, 아파트는 아파트대로, 숲은 숲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마을은 마을대로"라는 말로 아주 빈약하게나마 설명해 볼 수 있는 선생님의 조경관은 단순히 자연이 모든 걸 해결해 주길 바라는 자연만능주의, 혹은 모든 걸 원래대로 되돌려 놓자는 자연복원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한번 지형을 바꾸면 되돌려 놓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지금 땅의 모습을 잘 관찰하고 그 모양을 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선생님은 고민하셨다. 폐선 이후 버려진 철길의 모양을 그대로 살리며, 기차 옆의 담을 헐고 이미 아파트 안에 있던 나무를 활용해 조성한 경춘선 숲길은 한 예시다.


선생님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선유도공원의 사례 역시 마찬가지다. 선유도공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예로부터 전해져온 빼어난 풍광을 잃어버리고 2000년까지 정수장으로 활용되어 온 곳이었다. 선생님은 정수지와 약품침전지, 농축조와 조정도 등 이미 지어진 구조물과 건축물을 활용하여 최소한의 수정으로 공원을 조성했다. 지금 선유도공원은 한국 최초의 '환경 재생 생태공원'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러한 별명 앞에는 장소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특성과 미래의 모습을 함께 고민하여 가장 알맞은 정도의 개입으로 장소가 가진 오차를 수정하려고 했던 선생님의 결단이 있었다.


영화의 오프닝 역시 선유도공원이었다. 영화는 선유도공원의 많은 장소들을 차례차례 보여준다. 카메라는 정지해 있고, 그 안으로 그곳을 채우고 있는 작은 소리와 움직임이 들어온다. 천천히 감각이 깨어난다. 그러다 스크린에 한 아이가 뛰어 들어온다. 다시 아이가 카메라 바깥으로 나가려 하자, 카메라는 아이를 따라가며 처음으로 움직인다. 이 일련의 과정이 꼭 영화가 생명을 얻는 과정처럼 보였다. 조경이란 장소를 거니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활기를 얻고, 그것은 또한 미래의 세대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영화는 오프닝시퀀스를 통해 담담히 전달한다.


영화는 이어서 선유도공원의 전경을 대동여지도로 디졸브 시킨다. 이는 개발지상주의와 자본주의 논리로 점철되어 가던 대한민국 전 국토를 1970년대부터 직접 발로 밟으며 지도를 그려온 선생님의 작업에 존경을 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작은 정원도 국토의 일부'라며 조경을 할 때 늘 더 큰 스케일에서, 더 먼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던 선생님의 가치관을 표현하는 연출이기도 했다. 자연환경과 도시환경의 경계와 맞닿는 조경이란 '관계'를 옮겨 심는 일이기도 하다. 그 관계란 자연과 도시, 과거와 미래, 미시와 거시라는 이분법을 봉합한다.






3.

내가 이 영화에서 너무 좋아하는 참 별 거 아닌 장면이 있다. 개인 의뢰로 작업하셨던 한 저택의 정원을 선생님이 오랜만에 살피러 간 날이었다. 정원에 심을 씨앗을 주인에게 나눠준 선생님이 다음 장면에서 노트에 방명록을 쓰고 있다.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도 먹고, 잘 있다 갑니다' 같은 일상적인 문장을 적던 선생님이 종이를 구긴다. 이게 뭐라고 열두 번도 더 고치고 있네, 말하던 선생님. 대체 그 문장이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그렇게 다시 쓰고 있었던 걸까. 겨우 잘 있다 간다는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쳤던 선생님의 행동이 내게 깊이 남았다. 어딘가를 떠나며 그곳에 방명록을 남기는 일상적인 행위 자체도.


나는 자주 내가 남긴 글이나 흔적이 부끄러워지는 사람이다. 올해도 그걸 이기지 못해서 침잠했던 시기가 있었다(사실 지금도 그렇고). 거기에 게으름이 더해지며 많은 기록을 놓쳤다. 그런데 그냥 방명록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편해진다. "잘 있다 갑니다." "또 오겠습니다." 내가 그 순간에, 거기 있었음을 말하는 문장. 정말 그 정도면 될 것 같다. 욕심부리지 않고. 그래도 당연히 열두 번이고 고치며 쓰게 되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잃어버림'으로 존재하는 관객, 영화, 극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