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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Aug 11. 2024

후진에서 직진으로

폴 토머스 앤더슨, <리코리쉬 피자>

(2022)


※ 스포일러가 있어요


<리코리쉬 피자>는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만)가 결국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알라나가 마침내 사랑을 말하게 되는 영화라고 느꼈다. 알라나를 쫓아가는 트래킹 숏으로 시작해서 개리와 함께 달리는 알라나를 클로즈업하며 끝나는 영화.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은 1970년대 미국 사회 바깥에서, 남성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어디서도 자기 가치를 찾아내지 못했던 알라나의 시점으로 읽힐 수 있다. 정말 여러 관점으로 읽어낼 수 있는 다채로운 영화겠지만, 이 글은 딱 그 관점으로만 영화를 조금 들춰보고 싶어 쓴다.


핵심이 되는 사건은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의 차를 개리가 망가뜨린 뒤, 경사를 이용한 몇 분 간의 후진으로 알라나가 일당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장면. 앞서 알라나는 존 피터스에 의해 너무 순식간에 성추행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단지 너무 당황스럽고 불쾌한 감정만이 찌꺼기처럼 남아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알라나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을 칭찬하기 바빴던 개리,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기름통을 가지고 성기를 희화화하며 벌이는 놀이를 멀리서 무력하게 바라본다.


영화 초반, 알라나가 개리에게 플러팅을 당한 뒤 한 사진 기사가 그의 엉덩이를 때리는 당황스러운 장면에서부터, <리코리쉬 피자>는 이 시대를 단순한 낭만과 청춘의 시대로 묘사하기를 거부한다. 항상 다른 세계를 꿈꿨던 알라나의 욕망은 그를 거쳐간 남성들에 의해 비로소 충족될 것 같으면서도 항상 마지막 순간에 처참히 내쳐졌다. 그러므로 알라나의 후진은 결국 스스로의 잠재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직접 찾아나서야만 하는 힘겨운 '모색'의 움직임은 아니었을까. 직진이 아니라 어떤 동력도 없어진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행하는 후진이 주던 통쾌함은 정말 이상한 아이러니를 남긴다.


하지만 그 직후 알라나의 앞에는 똥멍청이 개리가, 뒤에는 그새 또 다른 여자들에게 플러팅을 하는 존이 있었다. 여전히 마초적인 남성 세계에 포위된 알라나가 찾은 제3의 돌파구는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도 정치. 그 시점, 수많은 정치적 움직임을 통해 다양한 미래가치가 제시되던 미국의 1970년대는, 이제야 알라나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에 부합할 것처럼 보인다. 알라나는 과대포장된 개리의 곁을 버리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알라나의 행동조차, 어쩔 수 없이 정치 캠프의 수장인 조엘을 위한 것으로 종속되고 만다. 조엘의 정치적 신념은 정말 알라나의 그것(알라나 역시 아직 잘 알지 못했을)과 일치했을까? 영화는 조엘의 정치적 행보에 관해서도, 그 시대의 다른 정치적 움직임에 관해서도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딱 한 번 나왔던 영상 촬영 장면에서도 조엘은 기존 시장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네거티브 선전을 보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알라나에게 조엘은 놓을 수 없는 동아줄이었을 것이다. 무대에 선 개리를 객석에서 보며 "제가 쟤 매니저예요"라며 뿌듯해하던 알라나. 그는 이제 조엘이라는 새로운 시장 후보의 캠프 직원으로서 비슷한 언어와 행위를 반복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개리 조력자가 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한 차원 높은 세계를 향해있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디어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잔뜩 품고 찾아간 조엘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라나는 또다시 그 기대를 배반당한다. 조엘이 게이라는 사실과, 그가 '멀쩡한', 그리고 시장 후보로 '적합한' 이성애자처럼 보이기 위해 자기를 이용하려 했다는 걸 알게 된 것.


그러나 이윽고 조엘의 애인을 대신 집에 데려다준 알라나는 그로부터 정말 뜻밖의 위로를 얻는다. 그는 알라나에게 네가 얼마나 따뜻하고 중요한 사람인지를 전한다. 그건 알라나가 정말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알라나 스스로도 자기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말. 이 영화가 알라나에게 비로소 그 가능성 -너는 너 자체로 대단하고 소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을 전해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은 직후, 알라나는 개리에게 달려간다. 개리는 알라나를 데리고 자기가 오픈한 핀볼 바에 데리고 가 자기가 이런 여자를 쟁취했다는 사실을 뽐내듯이 말한다. 개리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알라나다.


영화 마지막 장면. 알라나는 이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말은 사랑을 갈구하는 애처로운 고백이 아니었다. 나라는 존재가 너를 사랑한다고,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전하는 것. 그러니 참 정직하고 건강한 고백. <리코리쉬 피자>는 그리하여 두 사람이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알라나가 조금 더 자기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는 영화다. 알라나는 머지않은 시일 내에 개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떠밀리듯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과 선택으로 직접. 그렇게 믿을 수 있었을 때 영화는 끝이 났다.


알라나와 개리가 서로를 향해 달리는 씬은 그래서 일종의 착시 같았다. PTA는 영화에 나온 알라나와 개리의 모든 달리기를 정말 설레게도 묘사해 놓았다. 그건 달리기의 본질적인 속성이기도 할 텐데, 달리기는 그것을 하는 순간만큼은 순수함이 보장된 동작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사랑 영화, 청춘 영화처럼 보이게 만드는 결정적인 힘이기도 할 테다. 물론 정말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엔 아직 그들조차 다 깨닫지 못한 결정적인 착시가 있다.

개리는 자기 사랑에 심취한 채 알라나를 향해 달린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알라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반면 알라나의 달리기는 방향은 개리를 향해 있으나 달리기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당장의 감정에 최대한 솔직해지는 몸의 일차원적인 반응이다. 그를 지배하던 내면의 갈등이 없어진 채 달리는 알라나의 마지막 직진은 앞서 보여주었던 후진보다 한층 뭉클한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아직 미완의 움직임일지라도. 영화는 가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알라나를 클로즈업한다. 그제야 우리도 알라나를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알라나의 앞에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그가 개리를 떠나 살아갔을 과거의 미래를 상상해 보고 싶다. 거기에서 그가 개리에게 말했던 그 사랑은 충분했을까. 그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 역시 무력한 일이더라도 조금의 낙관을 쥐여 준 영화를 믿고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미래는 2022년의 지금에도 닿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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