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삶의 한 장면, '슬로우 비디오'
어떤 장면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느리게 보인다면 어떨까.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미녀 공심이>에서는 특정 장면이 천천히 보이는 동체 시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외에도 최근 드라마에서는 특정한 감각이 보통 사람보다 발달한 캐릭터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들의 ‘특별함’은 삶에 ‘능력’이 되기도 하고, ‘장애’가 되기도 한다. 보통 이 경우 극적인 상황에서 능력으로 발현되곤 하지만 <슬로우 비디오>는 조금 다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풀어가는 방식은 다소 밋밋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동체 시력’은 ‘장애’라고 하기엔 크게 불편하지 않고, ‘능력’ 덕을 보는 경우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슬로우 비디오>에도 동체 시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 여장부(차태현)가 있다. 초등학생 때 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찾아온 동체시력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 여장부. 그는 순간의 장면을 천천히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달리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느리게 보이는 그에게 달리는 행동은 상대적으로 너무 빠르게 느껴져 어지럽기 때문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공이 오는 속도와 방향은 남들보다 훨씬 빨리 캐치할 수 있지만, 달리지 못하기 때문에 야구선수는 못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가 능력을 발휘하는 방식은 오직 CCTV 관제탑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삶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 그 삶의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CCTV를 통해 마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하는 일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여장부가 주목한 사람들은 자신처럼 화면 속에 혼자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장부는 누군가를 감시, 혹은 보호하기 위해 생긴 CCTV의 의도와 정반대로 그들의 일상을 공유한다.\
한편, 여장부는 초등학생 때 짝사랑했던 봉수미(남상미)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는 배우의 꿈을 꾸며, 택배 아르바이트를 한다. 대사 한 줄 하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수없이 연습하고, 뛰어가다 받은 전화기에 대고 절박하게 노래를 부른다. 꿈을 포기할 수 없어서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봉수미에게 배우의 꿈은 능력이자 장애가 되는 셈이다.
여장부의 남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은 수미가 납치범의 타깃이 되는 에피소드다. 여장부는 그동안 CCTV에 가려 보이지 않은 공간을 가늠해서 그렸던 그림을 활용하여 납치범과 수미의 위치를 추측해낸다. 그곳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러 가는 초능력을 소유한 남자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납치범과 수미를 발견한 순간 쓰러지면서 결국 시력을 잃게 된다. 너무 무리해서 달렸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특별함은 때론 장애가 되기도, 그 사람만이 가지는 능력이 되기도 한다. <슬로우 비디오>는 장애인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는 조금 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라는 메시지를 제시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과 장애, 그 사이를 채우고 있는 일상적 삶을 들여다보도록 말이다.
본 글은 인터넷 신문 <에이블뉴스> '영화 속 삶의 한 장면' 코너를 통해 연재하고 있는 글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에 주목하여 서로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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