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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준 May 22. 2022

붕괴된 고향

당사자와 관찰자

망각의 평화

삶의 터전


지난 4월, 10개월 남짓한 미국에서의 첫 두 학기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분들과 연락하며 근황을 전하고 3주를 있다 보니, 모국의 언어와 음식에 대한 그리움은 채워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침의 설렘이 사라지는 저녁에는 미국의 친구들이 그립습니다.


반년 전, 힘들어하던 수업에서 저를 도와준 에티오피아 친구가 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점심을 사주며 어떻게 서로 미국에 왔는지 대화했습니다. 그는 미국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유학 설명회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저희 학교의 입학처장과 대화를 나누고 지원하여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꿈과 희망으로 무장하고 미국에 온 그에게, 자신의 고향이 내전에 휩싸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고향에서 수십 년을 산 그가 처음 타향살이를 하며 외로움과 씨름할 때, 그 뜻밖의 소식에 가졌을 상실감을 저는 가늠조차 못 하겠습니다.


“Uncanny Tranquility,” from West Ward

분열된 고향


불과 2년 전, 에티오피아의 아비 총리는 에리트레아와의 평화협정을 성공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티그라이족의 단독 총선으로 발발된 내전은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티그라이족은 인구의 6%밖에 차지하지 않지만 수많은 총리와 장성을 배출한 엘리트 소수민족입니다.


대중의 불만 속에서 2015년부터 일어난 거대한 민중 시위로 티그라이족의 정당인 TPLF는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오로모족의 ODP와 암하라족의 ANDM에게 정국을 빼앗겼습니다. 이후 코로나를 이유로 ODP의 아비 총리는 선거를 미루었고, 선거로 재기를 노리던 TPLF는 결국 자신들의 자치구에서 자체 총선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야당 TPLF의 행동을 위헌으로 보고 티그라이족과 전면전을 선포하고 현재까지 교전 중입니다.


작년 11월, 저는 수업 과제로 티그라이 전쟁에 관한 토론을 요약해야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대사를 역임한 GWU 객임 교수, CNN 출신의 에티오피아계 캐나다인 기자, BBC 아프리카 특파원을 수십 년간 지낸 런던 KCL 수석 연구원의 토론회에 참석했고 그들은 사건의 경위와 예측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그중 영국인 연구원은 인접 국가 에리트레아의 간섭으로 사건이 더 크게 번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Discrepancy,” from 116th Street Station

두 가지 잣대


에리트레아는 과거 TPLF 집권 시절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전쟁을 수행하며 수십만의 인명을 잃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인명 손실이 그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에리트레아는 아직도 티그라이족과 국경 문제로 감정이 좋지 않은데, 그들이 참전해버린 상태에서는 TPLF가 협상을 원해도 에티오피아는 아군 에리트레아의 거부에 쉽게 협상에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에 영국인 연구원은 에리트레아가 개입하기 전이었던 전쟁 초기 아프리카연합의 중재를 무시한 ODP의 이바 총리에 책임이 있다면서 에티오피아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이후 질의 시간에 에티오피아인 친구는 에티오피아 정부를 비판한 영국인 연구원에게 격앙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이며 질문했습니다.


TPLF는 테러단체이며 사람들은 강간당하고 살인 당하고 있다고. 어떻게 그들을 정당한 집단으로 보는지. 그들은 ODP와 다르게 부정선거를 치르던 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 연구원은 같은 잣대를 사용하면 ODP도 부정선거를 했다는 의혹이 있다면서, 그의 주장을 일축했습니다.


“Abandonment,” from a Thorny Lawn

객관성의 잔인함


이어지는 질문에서 그는 미국이 반군을 지원해 아비 총리의 정권을 무너트리려고 한다는 소문에 왜 미국 정부가 아무런 입장을 취하지 않는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출처 없는 정보에 교수들은 금시초문인 듯한 태도를 보였고, 그런 정보에 미국은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지 않는다고 했지만, 제 친구는 그런 입장이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킨다며 비판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사람들은 잠시 넋이 나간 듯했지만, 모두 그를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질의 시간이 끝나고 패널들이 각자 생각했던 바를 공유했습니다. GWU 교수는 자신들은 당사자가 아니기에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인정했습니다. CNN 출신의 기자는 이번 갈등의 주체인 부족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인 연구원은 기자들의 출입을 금지해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는 에티오피아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질의 시간 동안 평소 야무지고 총명하던 제 친구는 자신의 국가가 붕괴하는 현실 앞에서 동요하며 절망 속에 흔들리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는 평화롭던 고향을 찢어버린 반군이 미웠고,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 소위 "객관적인" 관찰자들이 자신의 나라를 기만한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에겐 TPLF의 단독 총선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처럼 보였을 것이고, 실제로 그게 실마리가 된 것은 맞습니다.


“Wobbling,” from Bloomsburg

무력함의 분노


하지만 TPLF가 단독 총선을 실시한 이유는 아비 총리의 야망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연방 형태의 정부에서 주도권을 쥐던 소수민족을 제압하기 위해서 그는 다수의 인구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중앙정치에서 소외된다고 느끼던 티그라이족은 6월 총선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지만 결국 코로나를 이유로 선거가 유보되고 아비 총리의 집권이 연장되자 자신들이 탄압당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티그리이족이 단독 총선을 실시했고, 그것을 위헌으로 본 ODP의 에티오피아 정부가 개시한 전쟁은 한쪽이 소멸하여야 끝날 것 같습니다. 이 전쟁은 더 큰 인명 손실로 마무리될 것이며, 제 친구는 자기 고향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멀리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토론회에서 이 현상의 책임을 각각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있다고 주장하던 CNN 기자와 영국인 연구원은 언성을 높여가며 서로의 말을 끊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티그라이에 거주하는 이모를 둔 에티오피아 학생만큼 이 문제에 절박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외국인 토론자들은 주장의 진위를 가지고 토론했지만, 에티오피아인은 자신들의 생사보다 뉴스의 출처와 예측에 집착하는 논쟁에 분노했습니다.


“Contrast,” from a Corridor

가려진 얼굴


참석자 모두가 에티오피아를 생각하는 마음에 이번 토론에 참여했지만, 제 친구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에티오피아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심장이 도려지는 문제가 외부인들에게 발톱이 빠지는 것보다도 못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그도 다른 국가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무관심했던 것처럼, 세계가 자국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입니다.


CNN 기자는 격화된 토론을 돌아보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학창 시절 상대편 정치인들과 새벽까지 싸우고 토론했지만, 이후에는 항상 펍에 가 맥주를 함께 마셨다. 지금은 이런 사례를 찾기 어렵다. 우리의 의견은 양극단으로 분열되어 있다. 하지만 고통은 어느 쪽에나 있다. 양쪽의 말이 모두 현실을 대표한다. 우리는 목소리를 끄집어내야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티그라이인들도 에티오피아인이다. 그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그렇게 토론자들은 토론 이후에 맥주를 마셨습니다. 훈훈하면서도 씁쓸한 결론에 미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분명 저희는 내일 새끼손가락을 잃는다는 것을 안다면 밤새 잠을 설칠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 1억 명이 죽는다는 사실에 밤새 잠을 설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숫자 뒤의 얼굴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In Remembrance,” from a Cemetry

기억하는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 뒤의 얼굴을 떠올려야 합니다. 관찰자의 방관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당사자와 행동하고 연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절망의 차례가 저희에게 올 때 무시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에게만 공감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선하더라도 그건 짐승의 애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리적 인식의 한계에 굴복하여 타인을 포기하고 매력적인 이성과 같은 배경의 아군에게만 공감한다면, 공감은 그저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부족주의의 유물일 뿐입니다. 귀족 앞에 머리를 숙이던 부르주아를 일으키고, 부르주아 앞에 머리를 숙이던 아내들을 일으키고, 아내들 앞에 머리를 숙이던 노예들을 일으키고, 비장애인에게 잊히던 장애인들을 일으키고, 그 모든 인간에게 희생당하는 동물의 권리를 일으키는 것은 부족주의의 공감이 아닌 보편적 윤리를 통해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그 보편적인 윤리로 모순된 현실을 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시궁창에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수십억의 인간을 망각하는 것이 당장 편의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실제로 망각하지 않았기에, 에리트레아인은 자신들을 핍박한 티그라이족에 보복을 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기억한 자의 책임이 아닌, 그 고리를 끊지 않고 지속하기로 선택한 민중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The Chain,” from Vessel

비극의 고리


때로 우리의 정체성은 억압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것은 반복되는 갈등의 고리를 만들고, 그렇게 억압과 갈등은 망각 속에서 쉬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부활합니다. 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문자를 통해 과거를 잊지 않고 지식을 쌓아 만물의 영장이 된 인류는, 바로 그 이유로 발전과 후퇴라는 고리에 갇힙니다. 얽혀버린 1993년 에리트레아의 독립전쟁과 2021년 티그라이 전쟁은 끝없는 비극의 한 예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만의 것이 아닙니다. 후대는 선대의 행동을 토대로 현실을 재창조합니다. 그렇기에 민중의 성찰과 변화가 없다면 이 비극의 고리는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극의 고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당사자인 인류의 역사를 바라봐야 합니다. 현대 희곡의 거장 안톤 체호프의 말을 빌려 글을 끝마치겠습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면 인간은 한결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선정릉에서

2022/05/22


본 글 사진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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