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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준 May 23. 2022

캉디드의 정원

서사의 종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돌아온 탕자들

방황의 서막


2018년 여름, 미국의 고등학교를 자퇴한 지 1년이 넘은 저는 자전거를 타며 새벽의 도시를 달렸습니다. 텅 빈 도로 위에서 이어폰을 끼고 도시의 끝까지 간 저는, 경계선을 넘어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의 개들은 새벽 3시에도 외부인이 침입했다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짖어대더군요.


날이 쌀쌀해져 자전거를 못 탈 때까지 그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모종의 이유로 아파트의 옥상에 가면 내심 제 몸뚱이가 떨어질까 기대하며 난간에 몸을 기댔습니다. 머리를 벽에 박아 혹이 났고, 자전거를 타다가 가로등에 부딪혀 종아리가 찢어졌고, 석고벽에 구멍을 내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부모님으로부터 피부가 까진 주먹을 감추었습니다.


이런 제 이야기에 공감하셨다면, 아마 여러분의 자아가 제 글에 투영되고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저 자신이 투영되고 발견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 서사의 주인공들은 모두 허망된 목표를 좇아 모험을 떠납니다. 산전수전을 겪어도 이들은 진리를 찾기 위한 고통이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평범한 삶으로 복귀합니다.


“Sand Castle: Old Royal HS," from Edinburgh

애드 아스트라 - 존재하지 않는 목적


로이의 아버지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찾겠다는 꿈을 좇으며 가족을 떠납니다. 그에겐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비록 실종됐지만 그는 지구에서 위인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그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로이의 아버지는 태양계 끝의 송신 기지에서 그 어떤 외계 생명체의 답신도 받지 못했고, 우주는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절규하는 대원들과 그들을 죽이고 혼자서 임무를 수행하는 미쳐버린 선장은 당국에 의해 은폐되고 실종 처리가 되었습니다.


우주가 텅 비었음을 확인한 로이의 아버지는, 설사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더라도 자신의 생에 그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선장은, 그가 원하는 타인이 바로 지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져버린 독에 희망이라는 물을 부으며 자신의 허망된 꿈에 집착합니다. 결국 계획된 기간보다 한참을 넘겨 운행된 기지의 발전기는 어떠한 에너지를 유출했고, 그 에너지는 지구에 도달하는 길목에서 재귀적으로 강해져 EMP 폭풍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현대문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당국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우주비행사가 된 그의 아들 로이를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로이는 아버지의 실체를 확인하고, 그가 발전기를 멈추고 복귀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태양계의 끝까지 찾아갑니다.


지구에서 태양계 끝까지 수개월의 여정을 홀로 보내며 로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광기의 그림자를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은 것에 망연자실하며 자신이 지금까지 꿈을 좇으며 내팽개친 친구들과 가족을 그리워합니다. 결국 아버지를 잃고 세계를 구한 로이는 가족을 찾아갑니다. 이런 로이에게서 저는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동남아와 미국에서 전학을 4번이나 하며 더 완벽한 곳을 찾아 헤매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제가 원하는 이상적인 교육은 없었습니다. 결국 열여섯 살의 나이에 독학을 하기로 마음먹은 저는 한국으로 돌아와 모 자사고에 입학 허가를 받고도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4년간 홀로 산 저는 로이와 마찬가지로 처절한 외로움을 느끼고 목표를 좇느라 잃어버린 관계들을 그리워했습니다.


“Earth,” from Richmond - Aske

캉디드 -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한다


'모든 일은 최선을 향해 나아간다'라고 믿는 낙관주의자 팡글로스의 제자 캉디드는 사촌 퀴네공드와 금지된 사랑을 하고 삼촌 툰더텐트론크 남작의 성에서 쫓겨납니다. 그리고 세계를 떠돌며 온갖 산전수전을 겪지만 이후 퀴네공드와 결혼하고 오스만 제국에 안착합니다. 점점 포악해지는 퀴네공드와 불편한 동거를 하며, 평범하게 밭을 가는 농부를 보면서, 캉디드는 스승 팡글로스와 마지막 대화를 합니다.


팡글로스: "최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연계되어 있네. 만약 자네가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 죄로 엉덩이를 발길로 차이면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또 종교 재판을 받지 않았더라면, 또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지 않았더라면, 또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또 엘도라도에서 가지고 온 양들을 모두 잃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여기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를 먹지 못했을 것 아닌가.
캉디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캉디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을 좇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초라하지만 확고한 사실, 바로 현실의 밭을 갈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됩니다. 이런 캉디드에게 저는 주어진 현실을 망각하고 이상을 좇던 저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한국, 동남아, 미국에서 성장하며 제가 살아가는 삶이 우연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한 곳에서만 통용되는 법과 언어, 빈곤 포르노에 의존해 외화를 비축하는 개도국의 비인간적 현실, 그리고 자신의 복지에만 관심을 두고 복지가 태동한 원인에는 무관심한 선진국의 주민들. 이처럼 태어난 환경에 인생의 폭이 결정되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살아온 그 어느 곳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근원적 문제인 ‘어떻게 윤리적이고 당위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보편적인 답을 얻지 못한 저는, 환경에 좌우지되는 현실이 아닌 수백 권의 고전에서 답을 찾고자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책을 적으며 세상의 시류에 휩쓸리지 않을 저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그것을 매개체 삼아 현실의 대지에서 밭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The Leap: Angel of the North,” from Gateshead

버드맨 - 줄탁동시


한때 승승장구하던 배우 리건 톰슨은 재기를 시도합니다. 브로드웨이에서 자신의 은사인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뮤지컬의 감독/주연으로 새로운 출발을 꿈꿉니다. 그는 자신의 오만함이 불러온 파탄된 재정과 가정을 돌아보며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되새깁니다. 그러나 운명의 펜자루를 쥔 평론가는 그를 한물간 양산형 영화배우로 취급하며 예술을 흉내 내는 그의 쓰레기 연극을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가족, 사랑, 인연, 재정, 평판, 친구를 모두 잃게 된 그는 자살을 기도하며 초연 시사회의 마지막 막간에 권총 소품을 진품으로 바꾸어 놓고 평론가가 바라보는 앞에서 자신을 향해 총을 발사합니다. 다행히 그는 실수로 머리가 아닌 코에 총을 쏘고, 평론가는 그에게 열광하며 새로운 전설이 태어났음을 대중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 초연함을 느끼는 그는, 버드맨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집니다.


한때 승승장구하는 부모님을 둔 저는 그게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고 제 삶을 그것에 맞추어 계획했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위해 현실을 떠나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은 중국과의 무역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습니다. 고난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했지만, 초원에서 자란 저는 황무지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허망된 꿈으로 책을 쓰면 모든 것이 끝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열여덟 살에 졸작을 출판한 저는 무관심이라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마지막 기회임을 되새기며 모든 힘을 짜내 목숨을 걸고 총을 발사했습니다. 다행히도 총알은 제 머리가 아닌 알의 껍데기를 깨며 저를 부화시켰습니다.


“Erosion,” from Barnard Castle

길가메시 - 영생


인류가 기록한 가장 오래된 서사인 길가메시 서사에서, 영웅 길가메시는 영생을 찾아 모험을 떠납니다. 그는 영생의 불로초를 손에 얻지만, 한 뱀이 그것을 훔칩니다. 불로초를 잃어버린 그는 결국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살다 죽습니다. 이는 영생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길가메시의 실패와 타협의 서사가 아닌, 인간은 함께 살아감으로써 영원히 살아간다는 우리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서사입니다.


어린 저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것들에 불안함을 느꼈고, 그런 이유로 불확실한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끝없는 지식욕이 무수히 많은 글을 읽고 쓰게 만들었지만, 현실과 접점이 없는 지식은 상아탑의 죽은 지식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두려움에서 나오는 통제의 욕구를 내던지고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불로초를 잊고 제 또래처럼 현실을 살아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고,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진로를 고민했습니다.


스무 살에 자퇴생 출신으로는 드물게 미국 상위권 대학의 학비 전액 장학생이 된 저는 차근차근 계획을 실현하며 미래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지엽적이지 않은 보편적인 사유의 토대를 찾고자 세계를 여행하고 학교를 나선 일그러진 자의 서사는 이렇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옴으로써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그 서사는 허무하지 않았습니다. 그 방황의 모험에서 저는 발가벗은 몸으로 짐승의 비참한 욕구와 선민주의를 던져버릴 수 있었습니다.


“New World: Whale Bone Arch,” from Whitby

방황의 종착점 - 새로운 모험의 시작점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홉스는 야만 속에서 만인과 투쟁하며 홀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고, 짧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야만의 역사를 우리는 연대함으로써 벗어났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회의하라던 "코기토 에르고 숨"이라는 경구에 빠져 무지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기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동물인 호모 사피엔스는 타인과 살아가기에 존재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로이, 캉디드, 버드맨, 길가메시는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20세기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는 참된 지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모든 지식은 개개인의 확실한 관점에서 보이는 것이다. 모든 관점은 세계를 향한 관점이며, 완전한 진리는 내가 보는 것과 남이 보는 것을 연속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얻어진다." 우리는 서로가 가진 공통분모의 토대 위에서 주관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구축합니다. 그 보편성의 지식은 인간에게 거대한 크기의 구조물을 무중력의 우주에서조차 건설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관적 인식의 한계로부터 오는 무지의 열패감을 타인과 연대함으로써 극복하고 혼돈의 자연을 이해했습니다.


인간은 종교, 역사, 정치, 경제, 철학, 과학, 사회 그리고 전공의 세세한 분야를 알기도 전에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견해를 가질 뿐이며, 견해와 믿음은 결코 사실로 치부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사실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가진 관점의 총합입니다. 우리는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신적 세계와 물리적 세계, 혹은 과학적 세계와 종교적 세계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조차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토대 위에서 연민과 중용과 사랑의 선구자들: 볼테르, 오르테가, 톨스토이, 홉스, 베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파인만, 카뮈, 하이데거, 루소, 포퍼, 소로, 지브란, 러셀, 촘스키, 케인스, 비트겐슈타인, 페소아, 오웰, 콜버그, 싱어, 생텍쥐페리, 니체, 후설, 헤세, 에피쿠로스, 워싱턴, 맹자, 공자, 노자, 장자, 무함마드, 석가모니, 아퀴나스, 예수, 그 외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과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과 과학자들과 종교인들과 예술가들과 코미디언들과 경제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이 제가 찾은 방황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모험의 시작점입니다.


"The Beginning,” from the Narrative

에필로그 - 가려진 구멍


자신의 과거는 그 누구도 대신해서 기억해주지 않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석고벽의 가려진 구멍을 바라보며 제 과거를 마주합니다. 그 벽 앞에서 저는 겸허해지고 경외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저는 무모했지만 찬란했던 우리 모두의 모험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제게 혼자서 이룬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서로를 본받고자 부단히 노력하기로 선택할 뿐입니다.


캉디드의 정원에서 뵙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이니 서로의 실수를 용서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자연의 섭리다.

- 볼테르


자연이 인간에게 이성과 도덕을 뒷받침하기 위해 연민을 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한낱 괴물에 불과했을 것이다.

- 버나드 맨더빌


세상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깊이 내려가 보았으니 높이 오를 때도 있지 않겠는가. 둘 모두를 찬미하리니.

- 올라프 스테이플던


울어라
자신의 처량함이 아닌
자신의 무력함에

웃어라
자신의 노력이 아닌
세상의 관용에

살아라
자신이 아닌
타인을 통해

- 필자


창백한 푸른 점에서

2022/06/01


본 글 사진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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