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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준 Apr 16. 2024

프로네시스의 발현

도덕으로서의 이성

칸트는 이성이 오로지 정념의 노예가 아니라 정의의 유일한 판단 척도라고 여겼다. 그는 도덕적 원칙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면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는 말도 남겼다. 지금은 자칫 극단적일 수도 있는 이 주장의 필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권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가는 제3세계의 대다수 국민과 일부 제1세계의 빈민층은 결핍적 사고를 가져 성숙한 시민을 필요로 하는 민주주의에 큰 위험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런 빈곤을 능력으로 합리화하는 사회에서는 천민자본주의와 도구적 이성이 난무하고 계층이동성도 줄어든다. 사회 내의 분열로 인하여 각기 계층의 삶은 동떨어지고 사회적 자본도 줄어드는데, 이들 중 다수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상의 수혜자라는 점을 볼 때 더 충격적이다.


현상학자 후설의 이 말은 분명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모든 자연과학은 그 출발점에서 소박하다. 자연과학이 연구하고자 하는 자연은 자연과학의 눈에는 그저 단순히 그 앞에 놓여 있다. 그래서 자연과학은 말하자면 사물이 경험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단순히 따라간다." 나는 자연과학이 믿을만하지 못하다거나, 유아론적 회의주의를 장려하고자 이 말을 꺼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코르토 에르기 숨"이라는 말 그 자체로는 극도로 개인적이고 자신의 생물적 출산까지 의심하는 의심병이라고 생각한다. 이 후설의 말이 중요한 이유는 존재하는 것을 단순히 처음부터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의 습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가 선대의 성취를 져버리는 후대의 실패를 불러온다.


예컨대 20세기 초 부귀영화를 누리며 이후의 정신적 진보에 고양되었던 유럽인들은 스스로 자멸했다. 분명 인간을 동물로부터 가장 크게 나누는 차이는 과거로부터 배움이다. 그렇지 않은 순간 우리의 도구는 우리의 목적이 되어 버린다. 배보다 비대해진 배꼽이 나타나 버린다. 막스 베버가 전문성과 관료제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경고한 대목이다. 그렇기에 무조건 오래된 것을 신봉하거나, 내 편과 네 편을 나누어서 논조를 흐리거나 하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그 누구도, 무엇도 완벽한 대안을 가질 수 없고 철인과 영웅과 성인군자는 존재하지 않기에 계몽된 다수의 집단지성이 필요한 이유다.


자신들만의 사유지에서 각자도생하는 사람들에게 공유지가 생겨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마도 가능한 한 빨리 공유지의 자원을 자신의 사유지로 옮겨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곳에서 공공의 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왜 부유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아요"라고 답하는 일부 고용주들이 존재하는 현실에 나는 칸트의 사고가 일정 부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흄의 말처럼 이성은 정념의 하인이고 노예일 뿐이며 순수하게 가치판단의 역할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이성을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말 그대로 자연과 본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동물이 가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홉스가 말하고 최근의 인류학이 관찰했듯이 자연 상태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 없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싸움을 지속하는 이기적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며, 짧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적 인간의 삶을 지양하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1) 닿을 수 없는 세상의 의미를 갈구하지 않아야 한다. (2) 협소하고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3) 도그마와 독선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4) 집단에 유리되지 않으면서 삶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찾고 형성해야 한다. (5) 사회와 지구촌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아야 한다. (6)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7) 스스로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김포에서

201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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