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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준 Apr 16. 2024

우연을 향한 필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 무의미란 없다


무의미를 추구하는 것도 의미의 추구이며, 이는 인간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물임을 보여준다.


의미란 가벼움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무거운 것에 대한 절대적 부정도 무거운 의미의 추구다. 나 자신을 남들과 다르게 만들어 주는 관념, 곧 의미라는 것은 그 어느 인간에게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니르바나를 실현한 부처는 그렇지 않을까? 니체는 그러지 않을까?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 짐승은 그렇지 않을까? 아닐 것이다. 이 셋 모두 무의미를 추구하는 흔적을 남김으로써 의미를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2. 우연의 긍정이란 필연이다


소설가는 왜 소설을 쓰는가? 과학자는 왜 연구소에서 서로 결과를 공유하는가? 철학자는 왜 토론하는가? 그들은 남들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 곧 고상한 구도자의 자세는 동료들의 관심을 구하는 재롱과 같다. 그리고 재롱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인간은 해석당하고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은 고유의 절대성을 상실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절대성의 상실은 주체성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주체성은 절대적이지 않은 재롱을 긍정하게 만든다.


우연의 대지에서 벗어나 필연의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은 주체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삶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시골 소년을 대통령으로 키우고, 엘리트를 살인자로 만들고, 하나의 문명을 멸망에서 구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필연의 세상에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연속성에 집착하며 그 경계를 헤맨다. 애초에 과거와 미래와 자아라는 것은 없는데 그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구축해야 하늘로 떠오를 힘을 얻는다. 왜 날아야만 하는가? 또한 왜 추락해야만 하는가?


심지어 이 글조차도, 무의미에 대한 의미의 추구로 보이게 만드는 필연의 재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는, 진수성찬을 똥으로 탈바꿈시키는 인간의 소화기관과 같은, 정신의 기능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수성찬을 똥으로 바꾸는 것에 대하여 화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혀가 기뻐하고, 옆에 앉은 동료 인간과 잡담을 나누며 연대를 느끼고 뇌가 기뻐하기 때문이다.


진수성찬이 똥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 이것이 바로 주체의 삶에 대한 긍정이다. 즉, 주체성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과거와 미래와 자아를 긍정할 수 있다.


3. 숙명은 언어를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모든 언어는 기준이다. 모든 기준은 이분법이다. 모든 이분법은 이분법을 생성한다. 이는 모순이다. 모든 언어는 기준이고, 모든 기준은 모든 이분법이다. 그렇다면 모든 언어는 모든 언어를 생성한다. 이는 모순이다.


이 모순은 하나의 결론을 도출한다. 바로 모든 언어는 언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이성과 신화는 답하지 못한다. 이성과 신화라는 언어는 이성과 신화라는 것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순의 인간을 탈피한 인간이란 삶의 당위성에 대하여 답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탈피하지 못하는 것인가. 탈피란 우연의 가능성이라는 가지를 충분히 넓혀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연의 가능성이라는 가지들을 잘라내고 하나의 필연에 집중하지 못해서 탈피히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애벌래에게 다른 식물이 아닌 누에만을 먹으라고 하는 것는 더 나은 삶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애벌래의 삶을 포기하고 나비가 되라는 것이, 더 넓은 가능성의 세계를 체험하라는 것이 애벌래에게 더 나은 삶이다. 왜냐하면 애벌래는 나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이 삶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할 수 있는데 왜 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지금의 삶을 얻어내기 위해서 무엇을 놓쳤는지 안다. 나는 다른 무엇에 관심을 주지 못했다. 나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다른 방식의 삶을 체험하지 못했다. 나는 분노에 휩싸여 살인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은 하나 마나한 것들이다. 내 목적은 탈피였으며, 그것을 위해 다른 경험을 한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나는 내 삶의 경험의 한계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비로소 모든 경험의 선택이 개연성 없는 거짓이었음을 알 때야, 자연의 로고스가 마련한 무수히 많은 선택지 중에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그저 카오스의 발현이었음을 알 때야, 우리는 지금의 삶이 유일한 것임을 인정하고 삶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에는 그 어떤 책임의 역할도 없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필연을 우연으로 부정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미래가 무질서한 것처럼 우리의 과거도 무질서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벌래는 유한한 삶을 나비로 끝내기로 선택해야 한다. 애벌래가 '지금'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숙명이다.


4. 세계는 실천으로 인식되고 창조된다


어느 머그잔 한 가운데에 섬이 있다. 그 섬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은하에 둘러싸였다는 상상을 하는 개미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개미는 '그저' 자신의 운명에 굴복해 목숨을 걸고 섬을 탈출해 컵이라는 벽을 보고 만졌다. 그 개미는 다시 돌아왔지만, 그는 더 이상 개미가 아니었다. 이는 탈피하지 못한 인간과 탈피한 인간의 다름을 보여준다.


은하는 무인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구하지 않는 자에게 그 무엇도 떨어지지 않는다. 구한다면 답이 찾아올 것이다. 로고스가 카오스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계의 한계를 모를 자유를 포기한다. 나는 한계를 넓히고자 내 한계를 공개한다. 그렇게 나는 분석과 비교를 당하며 절대성을 상실하고 초라해진다. 그러나 거기에서 나는 주체성을 발견한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을 찾고자 방황한다. 나는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올 죽음이 내 흔적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살아남는다.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고,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다면, 내 목표는 이루어진다.


청주에서

202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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