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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동준 May 15. 2022

별 헤는 크리스마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과 이별

사건의 발단


지난 12월, 긴장 속에서 첫 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무척이나 지루한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학생들은 캠퍼스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제 친구들도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도 영국에 거주하는 은사분의 초대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지루함의 시간은 너무나 길었습니다.


다행히도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과 서로 지루함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중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유학생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는데, 하루는 같이 등산을 했습니다. 산에서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제게 필라델피아에 사는 친구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여는데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잠시 고민했지만, 미국인 대학생들이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지 궁금했기에 가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서로 친해지고 하루가 지나 같이 등산을 하고 파티에 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기름값을 n분의 1로 내기로 하고, 친해진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세 명의 친구들은 필라델피아를 향해 학교를 떠났습니다.


“The World,” from Cira Green

새로운 만남


파티에는 제 무리를 포함해 10명 정도가 있었는데, 그들과 Beer Pong과 가라오케, 그리고 특이한 게임을 하면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습니다. 그 게임의 룰은 평범합니다: YES/NO로 답할 수 있는 질문 카드들이 있고, 자신의 순서에 참가자 중에서 YES라고 말한 사람이 몇 명인지 맞혀야 합니다. 이후 YES/NO를 왜 선택했는지 서로 돌아가며 설명해야 하고, 맞춘 사람은 보드판의 게임 말을 앞으로 옮기고, 도착점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게임의 질문들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낙태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투표권은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하는지,” “안락사는 정당한지," "무성애가 가능한지" 등등의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한 번은 "집안에 감옥에 투옥된 사람이 있는가," 라는 질문이 나왔는데, 강대국 대사를 지낸 증조부모가 권력다툼에서 패해 수감됐었다는 이야기, 먼 정치인 친척이 고문당하고 수감당했는데 그의 동료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이야기, 막대한 재산을 사기로 축적하고 지금은 감옥에 갇혔다는 사촌의 이야기와 같이 꽤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점차 재밌는 질문이 고갈되던 게임의 막바지에, 한 질문이 지루해하던 모두를 깨웠습니다. "부모님을 존경하는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 질문은 유독 한 사람에게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한 친구가 자신의 차례에 답했습니다. "난 부모가 없지만, 날 키워준 분들에 따르면 멋진 분들이었다고 한다." 자칫 어두워질 수 있었던 분위기는 제 유학생 친구의 재치로 잘 넘어가고 게임은 마무리됐습니다.


“Halo,” from Madison Square Park

예기치 않은 대화


남은 기간 그와 대화해보고 알아낸 이야기의 경위는 이렇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아버지는 도망갔고, 어머니는 홀로 그를 키웠습니다. 그는 모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미국의 친척이 자신을 입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친척을 초등학생 때 여의고, 또 다른 먼 친척에게 거두어져 미국 동부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이야기에 저도 경계를 풀고 제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동남아와 미국에서 살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책을 읽으며 방황하다가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온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 외에도 같은 문과 전공자로서 민주주의, 책임 윤리, 상대주의, 인류학 등의 주제로 재밌는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친구를 얻고, 영국에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여행을 다녀오고도 그와 몇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너무 많은 얘기를 해서 그런지 점점 할 얘기가 없어지더군요. 그는 직장인이기에 그 이후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Robustness,” from Durham Cathedral

다시 만난 우리


영국에서 돌아오고 친구들과 다시 그를 만났을 때, 로스쿨 진학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자 곧바로 스탠퍼드 로스쿨 학생과 연결해 줄 정도로 상당히 친해졌습니다. 로스쿨 학생에게 전화로 쏠쏠한 팁을 받고, 그의 노트를 흝어보던 중 한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 속에 있지만 그중 몇몇은 별을 바라본다." - 오스카 와일드


친척의 집에선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고아는 남부럽지 않은 학력과 경력을 꿰찼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기에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던 그는, 의지할 곳 없이 혼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수많은 친구와 동료가 있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지 못한 그는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저에게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최고의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너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 같아."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도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차근차근 밟고 있지만, 오히려 그 친구가 실천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별을 바라보는 것.


“The Star: Moon," from Richmond - Melsonby

우리는 별을 바라본다


그와 저는 닮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 둘 다 외롭게 방황했지만 별을 바라봤습니다. 완전히 다른 배경에서 자란 두 인간이 이렇게나 비슷한 사람이 됐다는 것에, 그리고 그 둘이 우연히 만나 자연스럽게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로 대화를 나눈 것은 그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친척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부모님을 그리워하던 고아와, 고향에서 따돌림당하고 유학을 갔다가 세상과 단절된 자퇴생은 서로에게 연민과 동정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대학을 같이 다녔다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을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군대에 가고 졸업할 때 그는 화려한 경력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사회인이 되어있을 겁니다.


어쩌면 저희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와 같은 사람이 존재함을 확인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는 분명 제가 한계에 다다를 때 한계를 넓힐 것이며, 제가 보지 못할 때 볼 것이며, 제가 굴복할 때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또한 언젠가 그가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포기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그에게서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그도 언젠가 저와의 만남에서 위안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Interlude,” from Teeside Sky

그와 이별하며


그처럼 노력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저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비록 모든 것은 끝나고 인간이란 존재는 완벽할 수 없지만, 노력하는 존재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앞으로 나아왔고, 또 계속해서 나아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남 뒤에는 이별이 있지만, 이별 뒤에 만남이 있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방화동에서

2022/05/19


본 글 사진의 저작권자는 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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