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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3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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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Apr 03. 2022

[정류장]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3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3월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뭐든지 리셋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가뿐함이 좋다. 아마 모든 새 학년이 3월에 시작되는 것도, 정초에 한 다짐이 끝내 작심삼일이 되어버렸을 때 3월 1일을 마지막 히든카드처럼 여기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나 번아웃이었던 것 같아."

-네가?


수화기 너머로 때려 박는 떨떠름한 반문에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애꿎은 구두 앞코만 바닥에 쿡쿡 찍었다.  


“왜? 나는 번아웃도 오면 안 되냐?"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건 막 밥 먹듯이 야근하고 갈리는 사람들한테 오는 거 아닌가 해서. 아 또, 기분 나쁘게 듣진 말고.


아니. 이미 기분이 상해버렸는데.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는 말조차 기분이 나쁘다. 부글부글 끓으려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느라 잠시 대답을 않고 있자 괜스레 다급해진 그가 화제를 돌린다.


-근데 번아웃이면 번아웃이지. 번아웃이었던 것 같다는 뭐야?


사실 나 조차도 100% 확신은 없다. 일도 적당히 하고 하고 싶은 것도 어느 정도는 하며 사는 내가 번아웃이라는 걸 입에 올려도 될까. 왠지 그 단어엔 자격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연말이 연시로 바뀌던 그즈음, 경험해본 적 없는 최악의 기분을 경험했다.


뭐랄까. 어릴 때 문구점 앞에 쪼그려 앉아 가진 동전을 다 쏟아가며 열심히도 했던 게임들이 생각났다. 12월이라는 끝판왕을 깨려고 이 악물고 손가락이 빠져라 조이스틱을 연타했는데 그걸 깨고 나니 1월이라는 첫판 빌런이 다시 등장한 기분이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1년 동안 정말 성실히도 일했는데 해가 바뀌어도 또다시 성실하기만 하다. 나는 평생을 이렇게 일하며 사는 걸까. 인간은 원래 이러려고 태어나는 걸까. 직장 생활을 몇 년 반복하다 보니 오는 현타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요 며칠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게 바로 번아웃이라는 건가 싶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거지. 뭐. 지금은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하긴, 넌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지. 뭐 작은 거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면 엄청 죄책감 느끼는 스타일이잖아.

 

열심히 하지 말라니. 출근길에 듣기에는 너무 기운 빠지는 얘기다.


“어, 나 버스 온다. 사무실 도착해서 톡 할게."  


그닥 위로가 되지 않는 대화에 아직 오지도 않은 버스 핑계를 대며 전화를 끊었다.  

다른 사람이 답을 줄 수 없는 문제라는 걸 잘 알기도 했다.


 느끼는 거지만 출근이 한창인 아침 시간대에도 배차 간격은  눈치가 없다. 덕분에 가장 바쁠 시간에 지금처럼 정류장에서 10분이나 허비해 버리는 일이 잦다. 사무실은 걸어서도 15 거리라 그냥 걸어갈까 싶다가도, 요즘은 정류장 벤치에 온열 기능까지 있다. 의자가 엉덩이를 뜨끈하게 데워주면 오늘 하루는 그냥 걸어가자는 마음을 먹는 것도 쉽지 않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초록색 버스가 코너를 돌아오는 게 보인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매일 똑같은 일상을 싣고 나를 태우러 오는 저 초록 버스.


버스가 코 앞에 와 섰는데도 정류장 벤치에서 차마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 건 어제의 피로까지 날려주는 온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내려놓을 필요가 있어.’


정곡을 찌르는 말이 내 고민을 다 해결해주진 못해도 마음을 휘저어놓기는 한 모양이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기분이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게 되는 이유다. 뭐, 사실 이러나저러나 재수 없긴 마찬가지다.


끝내 10분이나 기다린 버스를 그냥 보내버렸다.


버스가 떠나니 보이는 건너편 정류장엔  일렬로 늘어선 벚꽃이 흐드러지다. 만개는 진즉에 했다는 듯이 꽃잎은 하나둘 떨어지며 꽃비를 뿌린다. 벚꽃도 참 좋아했는데. 마지막으로 윤중로에 가본 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회사를 입사하기 전이던가.

 

통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그냥 쥐고 있기만 하던 핸드폰을 들어 오늘 급한 사정으로 연차를 사용하겠다는 메시지를 상사에게 보냈다. 마지못한 기색이 가득할게 뻔하지만, 모르겠다. 눈치를 보는 일까지도 내일로 미루고 싶다.


딱 오늘 하루만 멈춰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윤중로 벚꽃길 인근으로 가는 가장 빠른 버스는 4분 후 도착 예정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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