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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Mar 12. 2019

2. 최초의 집, 소란

동네에서 가장 시끄럽고 창피했던 우리 집


지긋지긋한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던, 꼬리에 꼬리를 물던, 박멸되지 않던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시끄러운 집이었다. 그건 어느 동네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창문이며 베란다며 집 밖으로 난 틈으로 거친 소리가 튀어나온다 싶으면 근원지는 늘 우리 집이었다. 나는 창을 열어 환기하는 그 잠깐의 시간에도 조마조마했다. 밤낮 할 것 없이 소란스러운 데는 늘 1등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독보적인 면모는 전혀 자랑할 게 못 되었다. 


소꿉친구들은 한동네에 사니 속사정 빤히 다 아는 터라 어쩔 수가 없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사귄 친구들에게는 우리 집의 실체를 숨기고 싶었다. 저런 집에 사는 애가 아니라 그냥 친구로서 나 하나만을 봐주기를 바랐다. 속 시끄러운 우리 집의 민낯 같은 건 말끔히 표백하고 싶었다. 그로 인해 형성된 어둡고 소극적인 성향까진 감출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하굣길에 친구들과 같이 집에 갈 때도 우리 집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냥 ‘저기 어디쯤이야. 그럼 나 갈게!’ 하고 혼자 휙 하니 길을 건너 따돌리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우리 집이 노출되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언젠가 같은 반 남자애들이 하교하던 내 뒤를 밟았고, 그걸 알아채고 냅다 뛰었지만 따돌리긴 역부족이었다. 결국 집에 들어가기 직전에 따라 잡힌 나는 ‘여기가 너희 집이야?’라는 물음에 ‘응’하고 이실직고해버렸다. 그 순간 우리 집 창문에서 뛰쳐나온 강렬한 쌍욕. 그때 이후 나는 충격의 여파가 꽤 컸는지 동네에서 아는 누군가를 마주칠까 봐 부러 걱정하며 살았다. ‘너희 집 그쪽이야? 나도 그 근처 사는데!’라는 말은 전혀 반갑지 않았고, 그런 말을 한 친구와는 아주 친해지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은 사귀던 사람이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할 때였는데, 집이 어느 정도 가까워져 오면 나는 ‘이제 다 왔어. 그만 가’ 하면서 등 떠밀어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심지어 집에 당도하기 50미터 전부터 뭔가 험악한 소리가 집 밖으로 들리면 ‘누가 이렇게 싸우나?’하는 남자친구의 말에 ‘그러게’라며 남 일처럼 연기하듯 자연스럽게 헤어지기도 했었다. 극구 빌라 출입구까지 무탈하게 데려다주는 날엔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늘은 집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내게 최초의 집은 항상 싸움이었다.


다섯 식구가 함께 살던 집은 싸움이 나면 도망칠 곳이 없었다. 소음을 피해 있을 곳은 오직 옥상뿐. 탈출할 곳 없는 미성년자였던 나는 까만 밤 옥상에서 바라다보이는 불빛에 많은 위로를 구했다. 하염없는 풍경 앞에서, 언젠가 독립할 날이 제발 그리 머지않은 시일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독립 이전에 살았던 나의 최초의 집들은 언제나 내게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2020년 3월에 나온 1인 가구 에세이집 《삶이 고이는 방, 호수》에 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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