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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Jun 12. 2019

7. 뱅쇼의 맛

내가 누구여도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  


원룸텔 생활 3개월 차, 평일에는 책 관련 사무 알바를 하고 주말에는 홍대입구역 커피빈에서 마감 타임 알바를 했다. 평일 알바는 몸은 편했지만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주말 알바는 너무 바빠 헉헉대며 일했지만 재미있었다. 서툰 나를 간 보면서 빡빡하게 굴던 직원 언니는 나중엔 츤데레처럼 잘해줬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고 번 돈을 써가는 동안 시간은 훌쩍 연말로 건너뛰었다. 일을 빼면 뭔 생각으로 뭘 하며 살고 있는지 한 마디로 응축할 수 없는 생활 와중에도 따뜻했 

던 순간은 있었다.


내가 ‘갤러리 헛 HUT’ 에 처음 갔던 건 초겨울 무렵이었다.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지금도 그대로인 건물. 홍대 상상마당 뒤쪽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봤을 단독주택을 개조한 연두색 벽돌 건물이 바로 갤러리 헛 자리였다. 이 시점을 이토록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 무렵의 분위기로 그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연말 분위기가 슬슬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크리스마스에 도달하기 전인 몽글몽글한 들뜸, 그리고 새해를 며칠 앞둔 크리스마스 직후의 절망감이 도래하기 전인 벅찬 피날레 기분이 한 데 섞여 있던 무렵이었다.


알바 후 방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매일 주변을 배회하던 경로에는 종종 갤러리 헛도 걸려 있었다. 작디작은 내 방 잠자리를 껴안고 보듬어봐도 도무지 그 온기가 성에 차지 않을 때, 나는 버릇처럼 밖을 쏘다녔다. 궁금한 도시에서 살던 사람처럼 살아보는 게 로망이었으나 그 로망을 실현하기에 서울은 별로 적합한 곳 같지 않았다. 순순히 봐주지 않는 까끌까끌한 도시였다. 3개월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적응했지만 살던 사람처럼 생활할 수는 없었다. 일단 내 집은 원룸텔이고, 보통 사람들은 원룸텔에 안 사니까. 여기 살던 사람에게는 있고 내겐 없는 것, 그게 뭘까 생각했을 때 ‘아, 태생적 익숙함이구나. 익숙해지려고 노력해도 적응해서 얻는 익숙함과 태생적 익숙함이 똑같을 순 없는 거구나.’라는 걸 알아채 버렸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울화가 치밀듯이 슬펐다. 


다 갖춘 듯 보이는 서울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태생적 익숙함을 부러워하다가 이곳으로 모험을 떠나올 수 있었던 대구 네이티브여서 좋았다고 생각할 수 있기까지 길고도 느린 마음의 변화를 거쳤다. ‘지나고 나니 다 아름다운 추억이었다’는 식의 합리화가 아니다. 이방인으로서의 충돌에서 오는 고민과 불안을 내 식대로 정리하고 태도를 정할 수 있게 된 후의 생각이다. 이런 류의 충돌은 공기처럼 생활에 스며든 문제라 더 힘들다. 마치 시간이 해결해 준 것 같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애를 써왔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시대에 서울밖에 모르는 건 오히려 촌스러운 일이니 썩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근데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고 뱅쇼, 뱅쇼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다. 갤러리 헛에서 뱅쇼를 처음 마셨다.


그날도 홍대 일대를 배회하다가 저녁에 전시장에 들어섰다. 촛불 몇 개로 밝힌 공간은 어두웠고 살짝 습하면서도 따뜻했다. 포틀럭 파티 같은 걸 하신 직후였는지 뭔가 끓고 있던 큰 솥에서는 달큼한 향이 났다. 뜨내기 방문객이던 나에게도 누군가 그 따뜻한 걸 한 잔 건네주었다. 끓인 와인은 처음이었다. 뱅쇼라고 부른다 했다. 내가 좋아하는 계피 향이 감도는 음료였다. 그걸 한 잔 받아 들고 두런두런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 섞여들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오게 됐어요?’로 시작하는 다정하고 가벼운 이야기. 환영받는 기분이었다. 갤러리 이름처럼 ‘헛! 이런 곳이!’까지는 아니지만 은은한 환대의 분위기가 좋았다. 십수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 기억을 이토록 오래 간직하고 있는 걸 보면 그때의 내가 벽 없이 환영해주는 누군가를 많이 그리워했던 것 같다. 



*2020년 3월에 나온 1인 가구 에세이집 《삶이 고이는 방, 호수》에 수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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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호

H리빙텔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보증금 0 / 월세 26

2006.10-2007.02 (4개월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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