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손길이 다녀가는 수목원은 시든 수목을 내버려두는 법이 없다. 제철을 다 난 꽃이 시든 자리에는 다음 계절의 꽃모종을 옮겨 심고, 잎을 완전히 떨군 몇몇 나무도 그냥 놔두지 않는다. 내가 사랑한 황금구주물푸레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른 낙엽 몇 개는 매달고 있던 나무였는데 오늘 가보니 꼭 누가 흔들어놓은 것처럼 잎 하나 매달지 않고 뼈대만 남아 있었다. 가지를 죄다 잘라놔서 키도 아주 작아져 있었다. 헐벗은 나무를 보니 빛나는 황금빛을 달고 있던 나무의 暖시절이 꼭 전생처럼 느껴졌다.
연둣빛 잎을 펄럭이며 여름내 나에게 부푼 마음을 안겨줬던 물푸레나무. 손바닥만 한 너른 나뭇잎들이 서로 손을 포개며 만드는 연한 그림자마저 아름다웠었다. 잎과 잎이 포개진 부분은 진한 연둣빛을 띠었고 안 포개진 잎은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 연한 노란빛을 띠었는데, 아닌 걸 알면서도 혹시 잎이 투명한 것은 아닌가 하고 유심히 올려다보며 나무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환하고 밝은 모습을 투명하다고 느끼는 건 그 대상이 식물의 잎이든 사람이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명에 가까운 연두 잎에 반해서 세 번 만나면 한 번은 잎사귀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자리를 뜨고는 했다. 내가 태양을 지참할 수만 있다면 휴대용 태양 빛이라도 들고 가서 흐린 날의 나무에 비춰주고 싶을 정도로 그 나무에서 빛이 노니는 순간을 사랑했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을 문학적이게 하는 몇 가지 풍경을 마주치게 되는 것 같다. 두 계절 동안 나를 이토록 감수성 풍부한 산책자로 만들어준 물푸레나무의 겨울맞이를 보면서, 낙엽수는 매해 새잎을 낼 때마다 새로운 현생을 사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잎을 내고 한껏 푸르렀다가 잎을 다 떨구는 시점에 마감되는 나무의 한 생. 작년에 싹튼 잎의 기억은 나무의 전생이 된다. 그렇게 한해 한해가 쌓여 나무의 나이테에는 수년, 수백, 수천 번의 전생이 기록된다. 나무의 나이테는 생을 거듭하며 쌓여온 나무의 윤회 기록이다.
평범한 사람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나무가 얼마만큼의 전생을 살았는지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쉬이 알지 못한다. 나무와는 되도록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상태에서 만났으면 좋겠고, 나는 되도록 나무의 나이테를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사람은 벌목이란 것을 하고 나 또한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을 일상에서 쓰고 있다.
혹여나 원목으로 만든 어떤 물건들의 나이테가 선명해 보인다면 한 나무가 수많은 전생을 살고 여기에 왔다는 것을 모두가 떠올렸으면 한다. 나무로 만든 물건을 쓰는 사람, 보는 사람, 만지는 사람 모두 다. 항상 보던 길가의 가로수나 정원의 나무, 빽빽하던 숲길의 나무가 갑자기 뽑혀 나가고 없는 것을 볼 때면 이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하고 슬퍼진다. 한 생애가 뿌리 뽑힌다고 생각하면 나무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초연해질 수가 없다.
*2022년 2월에 만든 에세이북 《장면채집록 흰그루》에 수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