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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Ko May 03. 2018

약정이 만료되었습니다.

휴대폰을 갈아타듯, 회사도 갈아탈 수 있다면 좀 나아질까?

[약정 만료 및 요금할인 가입 안내]
고객님의 약정이 5월 1일 만료되었습니다.
약정 만료 후, 단말기 교체 없이 계속 사용하고 계신다면 25% 요금할인....


드르르하는 진동소리에 문자를 확인해보니,

2년 간의 핸드폰 약정기간이 끝났다며 

재 약정 시, 25%의 요금할인이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래, 2년 전만 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스마트폰이었는데,

이제는 액정에 기스도 가고, 배터리 사용시간도 부쩍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메모리 최적화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돌려보지만, 전에 없던 버벅거림이나 어플 강제 종료 현상도 많아졌다.


2년


통신사들은 2년 약정으로 스마트폰을 팔아대고, 약정이 끝날 무렵 스마트폰의 기능은 현저히 떨어진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냐만은 "제조사들이 일부러 2년이 지나면 저절로 고장 나는 부품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져본 적도 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2년을 주기로 휴대폰과 통신사를 바꾼다. 일부 소비자들은 2년이 넘도록 한 회선을 고집하기도 하는데, 통신사들은 이를 '충성 고객'이라 떠받들며, 요금 할인으로 감사를 표한다.


인연


돌이켜보면 첫 직장을 고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내가 직장을 고른 것인지, 직장이 나를 고른 것인지조차 불분명하지만, 누가 골랐든 그건 우연이었다. 경영관 로비를 가득 메운 수많은 취업 상담 부스 중 하나를 찾은 것도 우연이었고, 생전 처음 보는 지원자 중 그나마 똘똘해 보이는 한 명을 골라 '적격' 등급을 부여한 것도 우연이었다.


우리는 우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때, 그것을 '인연'이라고 부른다.


인연이 일상이 되고 회사 생활에 점점 익숙해질 때쯤, 

어쩌면 회사와 내가 맺은 약정 기간이 끝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입사 당시에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였는데.. 

매일같이 반복되는 회의에서 마음의 기스는 하나씩 늘어만 가고, 퇴근 후 여가 시간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술자리를 매일같이 가지며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보려 노력하지만, 20대에 없던 숙취만 남을 뿐이다. 


핸드폰 약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오히려 회사에 대한 종속도만 더 커진다는 것이다. 충성 고객에 대한 우대는커녕, 40대 중반이 넘으면 은근한 눈치에 발언권마저 줄어든다는 것을 우리네 선배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간다는 것,


역시나 의미 없는 회의가 한창이던 어느 날, 문득 다가온 회의감은 쉽게 가시질 않는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업무도, 일을 미루려고만 하는 박 대리, 최 차장도 좋은 곳으로 이직하는 후배 녀석도 다 싫게만 느껴지는 오늘, 이런 감정을 어제도 느꼈고, 내일도 느낄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낄 때, 문득 이제 나이가 들었음을 느낀다.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새로운 도전보다는 포기하고 순응하는 나를 보며, 20대 후반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고 보니, 20대 후반 - 사회초년생의 나는 스마트폰을 참 자주도 바꿨던 것 같다. 약정이 만료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25% 요금 할인을 계산하는 한 사람, 스마트폰 액정 위로 비친 얼굴에는 세월의 주름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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