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여행을 그리 많이 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여행했던 곳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나라를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스페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낙천적이고 정열적인 사람들, 깨끗한 환경, 맛있는 음식 등 여행지로서 스페인이 가지는 장점은 무수히 많다. 수많은 장점 중 가장 의외였던 것은 바로 '치안', 스페인에서는 낯선 도시에서조차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늦은 시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골목골목마다 펍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맥주를 마시고 있어서 일 수도 있고, 첫 번째 여행지인 마드리드에서부터 친구들과 늦게까지 몰려다니면서 내성이 생긴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늦은 시각에 혼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지만, 별 탈이 없었고 그 덕에 여행은 더욱 풍성해졌다. 세비야에서의 첫 번째 밤에도 저녁 9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었지만, 아무런 부담 없이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 바로 메트로폴 파라솔이다.
독일의 건축가 율겐 마이어 헤르만에 의해 2011년 완공된 메트로폴 파라솔은 높이 26미터에 너비가 자그마치 150미터나 된다. 약간은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디자인 탓에 완공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메트로폴 파라솔은 대왕 버섯(Las setas)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막상 가서 본모습은 버섯보다는 오히려 물고기에 가까웠다.
파라솔이라는 이름 때문에 뜨겁게 내리쬐는 스페인의 태양을 피해 메트로폴 파라솔이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 아래서 맥주를 한 잔 들이켜는 그림을 상상하곤 했었는데... 웬걸, 어두컴컴한 밤중에 그것도 비 오는 날 오밤중에 이곳을 찾게 될 줄이야... 늘 출발하기 전부터 꼼꼼하게 계획하지만, 막상 여행을 하다 보면 항상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장면이 펼쳐지곤 한다. 계획과 다르게 펼쳐지는 우연에 일희일비하는 것을 보면 여행은 우리의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
지금이야 사진을 뒤적거리며, '오, 그래도 여기 야경이 꽤나 이쁜데...'라고 중얼거리고 있지만, 사실 당시에는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느라 몸이 제법 피곤한 상태였고, 열흘 만에 다시 찾은 스페인의 하늘은 나의 바람과는 달리 빗방울을 심술궂게 흩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사진은 또 언제 찍어 놓았는지조차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여행을 즐기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불평만 늘어놓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저 때만큼 복에 겨웠던 때가 또 없지 싶다.
관광객 한 명 없이 썰렁한 이 곳, 계단을 따라 올라가야 하나 했는데, 계단 옆 쪽으로 작게 마련된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매표소가 있고, 거기서 티켓을 구입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이동할 수 있다. 참고로 메트로폴 파라솔 입장료는 3유로인데, 근처 카페나 펍에서 음료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쿠폰을 주기 때문에 사실상 무료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나저나 클럽도 아니고 티켓에 1 drink 포함이라니...
입장권과 음료 쿠폰을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맙소사! 정말 내가 클럽에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반질반질 빛나는 스테인리스 재질의 벽면에 하얀 원형의 스티커가 화려하게 붙어있는데, 괜히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하는 느낌마저 든다.
옥상에 도착했는데, 다시금 굵어지는 빗줄기에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아! 그냥 집에 갈걸 젠장...
사실, 세비야의 불그스름한 야경과 메트로폴 파라솔의 현대적인 조명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문제는 비! 여행에 있어 날씨가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사진만 봐서는 뭐가 그리 불만인가 싶으시겠지만, 습한 날씨에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보면,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개고생인가?"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뭐 굳이 당시의 감정을 끄집어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투정만 잔뜩 부리고 있는데, 그래도 사진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다시금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날씨가 좋은 시기에 일정을 여유 있게 잡고 낮에 한 번, 밤에 또 한 번 이곳을 찾아 옥상에서 커피도 한잔하고 밤에는 펍에서 맥주도 한 잔 하면서 축구를 보면 엄청 행복하겠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투덜거리며 메트로폴 파라솔을 찾았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페인 광장! 광장의 입장이 제한되는 12시쯤 그곳을 찾으면, 텅 빈 광장에서 화려한 야경을 혼자서 오롯이 차지하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세비야 대성당에서 바로 스페인 광장으로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시간이 약간 애매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빡빡한 일정에 기왕이면 하나라도 더 보자는 생각에 메트로폴 파라솔을 먼저 구경한 후,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동선이 무척이나 비효율적이었지만,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11시가 좀 넘은 시각에 스페인 광장에 도착했는데 입구가 단단하게 잠겨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수많은 블로그에서 12시까지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결같이 이야기했었는데... 그들이 단체로 사기를 쳤을 리도 없지 않은가? 당시에는 멘탈이 좀 심하게 무너져서 추스르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도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절기와 동절기에 광장 운영시간이 조금 달랐던 게 아닌가 싶다. 나처럼 3월에 세비야 스페인 광장을 찾는다면, 11시에 문을 닫을 것으로 생각하시고 조금 일찍 움직이시길!
내일 오후에 론다로 넘어가야 하는 일정 탓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스페인 광장의 야경은 다음 기회를 기약해야만 했다. 그 기회라는 것이 다시 올지도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담장 너머로 우뚝 솟은 탑을 바라보며 연신 셔터만 눌러댔다. 그나저나 이쁘긴 진짜 이쁘다. 꼭! 다시 세비아에 가서 스페인 광장의 야경을 보고 말리라! 그때 했던 다짐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세비야 공항에 처음 내려 빗줄기를 맞았을 때부터 뭔가 불안한 느낌이 엄습해왔었는데, 결과적으로 오늘은 날씨부터 음식, 동선 등등 여러 가지로 엇박자가 자꾸 나면서 뭔가 꼬이는 하루였다. 한 달 가까이 긴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날도 하루 이틀쯤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애써 위로를 해봤지만, 숙소로 돌아가는 길, 착잡한 기분을 떨치기는 힘들었다. 얼른 돌아가서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려나? 그래도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은 멋진 하루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으며, 아쉬움을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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