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마흔다섯 번째 이야기
1박 2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론다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은 당일치기와 1박 2일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한다. 도시가 그리 크지 않고, 관광 포인트라는 것도 사실 누에보 다리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빠듯한 일정에 쫓기는 대부분의 단기 배낭여행객들에게 론다는 그저 여행 중 잠깐 스쳐가는 마을이 돼버리곤 한다.
하지만 뭔가 아쉽다. 아침 일찍 버스나 기차를 타면 오후 12시~1시쯤, 론다에 도착한다. 터미널에 짐을 맡기고 누에보 다리를 구경하고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시각은 대개 4시~6시, 한 나절 남짓한 시간은 하나의 도시를 보고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론다에서 하룻밤을 보낼 것을 추천한다. 도저히 시간이 안 난다고? 그럼 차라리 론다를 건너뛰고 바로 다음 여행지로 향하자! 론다에서 1박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아마 이번 포스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카메라만 달랑 챙긴 후, 밖으로 나왔다. 론다 여행의 하이라이트, 누에보 다리를 구경하기에 앞서 엘라메다 델 타호 공원으로 향했다. 론다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일종의 전망대인데, 사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없다. 절벽 위에 정자같이 생긴 차양막(?) 하나 있는 게 전부다. 타호 공원보다 차라리 사진 속에 보이는 저 놀이터가 개인적으로는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 놀이터와는 달리 디자인이 뭔가 앙증맞은 게 내면 깊은 곳의 동심을 끄집어내는 기분이랄까? ㅋ
놀이터에서도 론다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탁 트인 공간에 아래로 펼쳐진 시골 풍경에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절벽 끝까지 다가가 발을 삐죽 내민 후, 일단 사진을 한 방 찍었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높이가 장난이 아니다.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절벽 저 아래 집들이 성냥갑만 해 보인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봤으니, 이젠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볼 차례, '하나, 둘, 셋, 그리고 번지!'를 외치며 뛰어내리는 시늉을 하는데, 저 옆에 외국인 커플이 피식 웃는다. 분명 아까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 쪽팔림을 애써 감추고 다시 호텔 방향으로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ㅠ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누에보 다리 건너편 구 시가지에 있다. 구글 맵에 'Plaza Maria Auxiliadora' 입력한 후, 스마트폰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사진에 보이는 동상이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나,
분홍색 벽과 조금은 가파른 돌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 론다 여행의 하이라이트, 누에보 다리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를 만날 수 있다.
드디어 만난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무려 40여 년의 공사 끝에 1793년에 완공된 누에보 다리는 120m의 깊은 협곡으로 나눠진 론다의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를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Puente Nuevo'는 '새로운 다리(New bridge'라는 뜻인데, 론다의 양쪽 지역을 잇는 3개의 다리 중에서 가장 늦게 건설되었기 때문에 '누에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누에보 다리 왼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파라도르 호텔이다.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 관광산업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해외 사례로 론다의 파라도르 호텔을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자연환경 보전을 위해 산지에 숙박시설 건축을 제한하는 규제가 있다. 자연보호의 취지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어쩌면 그런 규제 때문에 우리나라는 파라도르 론다 호텔처럼 특색 있는 관광시설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 고등학교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듯, 국토의 70%가 산지인 나라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관광산업을 육성하려면 파라도르 론다 사례처럼 자연과 개발이 공존하는 모델이 필요하다는 뭐 그런 취지의 보고서였다. 자료를 찾으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바로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다니, 가슴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ㅠ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파라도르 론다 호텔! 자연경관과 인공 건축물이 이 보다 더 조화를 이룰 순 없을 것 같다.
저 멀리 반대편 산 너머로 해가 넘어가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지면서, 누에보 다리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라고 만든 표현일 거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두고도 야경 사진을 제대로 찍을 줄 몰라 무작정 셔터만 눌러대는 나 자신이 조금은 한심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을 미리 좀 배워두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포스팅을 하려고 보니 쓸만한 사진이 없다. 다음번엔 사진을 제대로 배워서 삼각대를 들고 이 곳을 꼭 다시 찾으리라!
굳은 다짐을 하고 돌아가려다 뭔가 아쉬워서 똑같은 사진을 다시 몇 장 더 찍고, 또 올라가려다 돌아서서 멍하니 누에보 다리만 바라보기를 수차례, 절벽 아래에서 거의 서너 시간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던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아래에서 바라본 것만큼은 아니지만, 론다 시가지의 야경도 제법 운치가 있다.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시골 마을처럼 한적한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이 곳에 호텔 하나 가지고 있으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을 것 같다.
파라도르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누에보 다리의 모습이다. 기막힌 야경을 안주삼아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지만, 본의 아니게 등산을 마친 뒤라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숙소로 가서 샤워를 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막상 방으로 들어가니 그게 맘처럼 쉬운 일은 아니더라.
나중에 그라나다나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론다가 생각보다 별로였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주로 당일치기로 여행을 한 사람들이었는데, 누에보 다리 달랑 하나 보는데 왕복 5시간을 넘게 투자할 필요가 있냐는 이야기였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론다에 와서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못 봤으니, 론다가 별로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적어도 이 포스팅을 보는 사람들만큼은 당일치기 대신, 론다에 하루 정도 머물 것을 추천한다. 비싼 돈과 시간을 투자해 론다까지 왔는데, 이 황홀한 야경을 못 보고 가는 것은 좀 억울하지 않을까?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보지 않은 자여!, 당신은 론다를 논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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