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한다. 소위, 노동이라 불리는 그 '일'을 우리는 한다. 일로써 생활을 꾸리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며, 인생의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육체적인 일을 하든, 정신적인 일을 하든 저마다 자신의 몸을 활용해 뭔가를 한다는 중요한 사실. 나의 노동은 글을 쓰는 것이다. 그 일로 나의 생활이 유지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부터 갸웃거린다. 생활이라는 그것이 사람들마다 패턴이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거나 지금까지의 나는 내가 선택한 노동을 후회해본 적이 없다.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응엔 우려가 섞였다. 적극적으로 말릴 수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본인이 하겠다는데, 대신 살아주는 삶이 아니니, 선택은 나의 몫이다.
작가의 길로 들어선 이상, 내 인생이 호화로울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궁핍한 생활은 하더라도 내 정신의 풍요로움 또한 온전히 나의 것이다. 호화로운 생활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글을 쓸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까.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것은 아니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서서히 나를 알아갔다. 나란 존재의 재질과 성향에 대한 것들을. 나 자신이 금방 싫증 내는 일들에 대하여.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내 인생은 단순해졌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들을 떼어냈다. 쓸데없는 보내는 유흥의 시간과 헛헛한 만남과 관계들을 뒤로했다. 내 인생에서 우순순위가 된 것들만 남겼다. 나의 일상은 홀가분해졌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하고 싶은 것. 해야만 되는 것. 내 인생에 들어와 있는 소중한 사람들. 나는 거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이 줄어들었다.
마냥 좋기만 해서 괴로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과 기쁨 사이를 오가며 완성한 나의 작품들이 거절당할 때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십 수년을 그렇게 지내왔으면 이제 때려치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통증을 느낀다. 그들의 말이 너무 쉬워서다. 결과가 있든 없든, 타인의 인정을 받든 못 받든 그것이 내 인생에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내게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온 일이 되었는데 말이다. 나와 함께 내 인생을 수놓은 일이 되었는데 말이다. 결과에 초조해하지 않고, 남의 인정에 굶주려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그것만으로도 나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내 인생의 우선순위를 차지한 글 쓰는 일은 쉽게 순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으니 내게는 수양의 도구가 된 글쓰기다.
글을 쓰는 것 이외의 일들은 통상 삼 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나의 관심을 오래 끌지도 못했고 내 의욕에 불을 댕기지도 못했다. 쉽게 바닥을 드러내 보였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나는 싫증을 잘 냈다.
글을 쓰는 일만은 달랐다. 아무리 해도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생각만 들었다. 배움의 연속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어려움 때문에 나는 십 수년의 세월이 지난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 싫증 내지 않고 지쳐하지도 않으면서. 힘들다 싶으면 금방 관두는 이들을 보면 그래서 안타깝다.
블록을 쌓았다가 허물기를 반복하는 아이처럼 나의 글쓰기도 그랬다. 똑같은 상황의 과정들이 반복되었다. 썼다가 지우고 다시 하기를 끝도 없이 반복했다. 결과는 매번 달랐다. 나의 상상이 조금씩 자랐고 나의 글이 조금씩 영글어갔다.
나아지는 과정을 지켜보자면, 기쁨은 내 안에 있었다. 어렵고 힘들지만 뾰족한 것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중의 하나라면 하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백아라는 거문고의 달인이 살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알아주는 종자기란 친구가 있었다. 백아가 높은 산세를 거문고 줄에 담으면, 종자기는 “하늘 높이 우뚝 솟는 것이 태산처럼 웅장하다”라고 감탄했다. 백아가 드넓은 강을 거문고로 표현하면, “도도하게 흐르는 강의 흐름이 황허강과 같다"라고 맞장구쳐주었다.
백아가 연주하는 곡을 들을 때마다 종자기는 그 곡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었다. 거문고 연주를 하는 백아의 마음과 음악의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할까. 어찌 되었던 백아와 종자기는 음악가와 청취자로 어울리는 한 쌍을 이뤘다.
종자기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백아는 자신의 거문고 줄을 스스로 끊었다. 친구의 죽음이 그만큼 슬펐다고 해야 할까.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니 더는 켤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어떤 이유가 됐든 백아는 행복한 사람이다.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완벽하게 공감해주는 친구가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쓴 글에 공감하고 내 의도를 알아채 주는 독자를 만나면 나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그 희열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울 만큼인 것이다. 나의 글쓰기 노동이 더욱 즐거운 순간이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이 긴 터널을 나 홀로 빠져나왔다.
어떤 분야의 일이든 십 년은 해야 그 분야에 몸담았다고 소위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나의 경우는 더 긴 어둠의 터널이었다. 빛도 없이 지나오는 동안 한눈을 팔지도 않았다. 내 인생의 우선순위이고 내 오랜 짝사랑이기도 했다.
자기만족에서 시작한 일일지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스스로 위축되기도 한다. 그 또한 욕심일지 모른다. 나의 일은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다.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나 자신에 대한 긍지를 키워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내 일의 긍지가 타인에게서 나온다면 그 타인이 사라졌을 때, 백아처럼 거문고 줄을 끊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종자기가 명을 달리 한 후에도 백아가 거문고를 연주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종자기를 위해서 그리고 백아 자신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좋아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게 된 일을 즐길 수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소신을 갖고 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어디에서 하든 빛을 발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온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지 않는다 해도 그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 안의 연꽃을 피워내는 일인데 말이다. 내 안에 긍지와 신념은 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희로애락이 녹아들어야만 생기는 일이다.
그렇게 지난여름, 나는 또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내 노동의 희로애락이 버무려진 이야기다. 문화예술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중후기의 민화를 소재로. 양반만 그것도 고관대작의 사대부가나 남길 수 있는 평생도를 민화로 둔갑시켰다. 척박한 인생의 노비가 사대부가쯤 되어야 가질 수 있는 평생도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