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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수련 Feb 04. 2022

죽음

삶과 한 몸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로마시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장군과 병사들이 가두 행진을 하면서 '메멘토 모리'를 외쳤다고 한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다. 전쟁에서 적이 아닌 자신이 죽는 그날이 언제든 올 수 있는 것이기에 오늘의 승리에 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삶과 죽음을 동시에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다. 나 자신의 죽음을 매 순간 기억하며 살기란 더욱 어렵다. 삶만 생각하게 되면 자만에 빠지기 쉽고 죽음만 생각하게 되면 우울감에 빠지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용을 지키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태어남과 동시에 인간은 언젠가 한 번은 죽고 그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일임에도 곧잘 잊어버린다. 삶에 바쁘거나 삶을 누리거나 평범한 사람이 노상 죽음을 옆에 끼고 다닌다는 것도 상식선의 일은 아닐 것이다.


일상에서의 나는 죽음에 대해 비교적 담담한 편에 속한다. 한창 살아야 할 나이에 죽음과 맞닥뜨린 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있지만 어느 정도의 삶을 살았다면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만약 그가 종교라도 갖고 있다면 기뻐해줘야 할 일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인간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자신이 믿었던 신에게 돌아가는 일이니 말이다.


나 역시 짧지 않은 삶을 살아왔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준비를 가끔은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이는 "그 나이에 무슨 벌써? 아직도 창창해"하고 어떤 이는 묵묵부답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길었던 그때는 몰랐다. 죽음이 이토록 내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 막 생명을 얻은 아기가 생명의 소멸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때의 내게 죽음은 잘 상상되지 않는 그런 거였다.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미취학의 어린애였다. 죽는다는 것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고 지금처럼 직설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라도 내가 죽음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어른도 안 계셨던 것 같다. 내가 궁금해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묻지 않아서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


그때의 나는 할아버지가 오랜 잠에 드셨구나,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슬프지도 않았고 죽음이 실감 나지도 않았다. 한여름의 우리 집 마당으로 누런 천막들이 들어서고 일가친척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이 조문을 위해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지만 나는 덤덤했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삶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해야만 했던 마흔이 되면서였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곧 동시에 삶에 대한 사유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잘 죽는 법. 그것은 동시에 잘 사는 법을 말함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자신이 백세까지 살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보다 젊은 사촌동생이 나보다 앞서 죽음과 만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의 나이 마흔 무렵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다.


폐암을 앓던 그는 가족 누구에게도 이를 알리지 않았다. 죽음에 임박한 그때에 이르러서야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 그는 치료를 거부했다. 참으로 대단한 결단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아들을 둔 아버지의 태도였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앞세우고 싶을까. 할 수만 있다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 아들의 생을 잇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아들의 결단을 존중했다. 무엇보다 당신의 아들이 하느님을 믿던 사제였기에 하늘의 부름에 기꺼이 동조했다. 아직 젊으니 뭐라도 해보자는 의사들의 말을 단념시켰다.


삶과의 작별.


그것이 용기였는지, 삶에 대한 지겨움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의술이 발달한 까닭에 암이 자연사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떠돌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삶과 작별한다는 것은 이를 지켜보는 이들에겐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가 가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의 삶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하루하루의 삶을 살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지난날보다 짧은 인생에 와 있다는 것. 어느 집에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보다 어느 집에 누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더 많이 듣고 있다는 현실이다.

잦아든다 싶던 코로나19가 나의 예상을 빗나가 날로 확산일로다. 의도치 않은 상황으로 인해 전 세계인이 뜻밖의 죽음들을 목격하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다면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 자신의 죽음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이든 호상을 맞이한 죽음이든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죽음은 삶만큼 존재한다.


추리소설을 쓰는 내게 죽음은 일반인보다 더 자주 가까이에 존재한다. 나의 머릿속은 다양한 죽음과 그 죽음의 배경 사이를 오간다. 그 어떤 삶도 만만하지 않고 그 어떤 죽음도 결코 가볍지 않다.  


'노인에게는 젊은이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것이 없다. 이것만 보더라도 생명이 귀중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미국의 여류 극작가인 애킨스는 말했다.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삶을 이야기한다.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고 속삭인다.


삶과 죽음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동전의 앞뒷면처럼 하나의 몸이다. 잘 죽고자 한다면 제대로 살아야 하고 제대로 살았다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인 나바호족들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이 존재한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니 네가 죽을 때에는 세상이 울어도 너는 기뻐하는 그런 삶을 살아라."


죽음만큼 삶은 소중하다. 삶만큼 죽음 또한 소중하다. 우리가 삶과 죽음을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죽음을 식탁에서까지 말할 필요야 없겠지만 죽음을 가까이에 둔다는 것은 선한 삶을 살아간다는 또 다른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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