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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수 May 20. 2019

화장(火葬)

[세계여행 Day 38]

 바라나시(Varanasi)에 오면서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봐야겠다고 생각한 게 두 가지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열리는 뿌자 의식, 그리고 화장터.

 바라나시 첫 날,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화장터가 있는 가트 근처까지 갔었다. 그런데 도무지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가지 말라고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내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무서웠다.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죽어있는 사람을 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다. 11살, 외할아버지 임종 순간에도 나는 집에서 동생과 TV를 보고 있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화로 접했을 뿐이었다. 
 나한테 ‘죽음’은 기껏해야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생명의 기운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의 형체를, 그리고 그게 바스라지듯 불 속에서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 막연히 무서웠다.
 불에 타다가 발이나 머리가 뚝, 하고 굴러 떨어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안 그래도 나는 공포 영화 조차 잘 못보는 사람인데.  

 ‘바라나시 화장터 가보기’는 꽤 오래된 내 버킷리스트였고 그걸 실현할 수 있는 장소에까지 왔지만, 그걸 실제로 하는 건 분명 또다른 차원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었다.




 어제 갠지스강을 따라 가트를 쭉 걸어가다가 유난히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했다. 큰 모닥불이 사람들 사이로 얼핏 보였고, 그 위로 끊임없이 짙은 연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 화장터다.’ 
그렇게 무서워했던 내가 어떻게 마치 뭐에 홀린 듯이 주저하지 않고 나아갔는지 모르겠다. 사람들 사이를 조금 비집고 들어가서 내 앞의 풍경과 마주했다.


 돌로 만든 단상 위에 나무 장작이 곧게 쌓아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사람이 누워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감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편안해 보였다. 오히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은 사람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내 모습에 더 놀랐던 것 같다.


 머리를 다 밀고 무채색 옷을 두른 청년이 그 주위를 돌며 불을 붙여갔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불 덮듯이 불을 덮고 편안히 누워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딱히 잔인하고 끔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땅을 굳게 딛고 섰을 두 발과 다리가,
 누군가를 어루만지고 위로했을 두 손이,
 세상을 보고 자신의 소우주에 담았을 두 눈이,
 한 꺼풀의 연기로, 한 줌의 모래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하얗게 분칠했던 얼굴은 점점 녹아내려 본래의 색을 찾아 어두워졌다.


 무섭게 타들어가는 불꽃의 열기 때문에 그 위 공기가 아른거렸다. 건너편 사람들의 실루엣이 흔들거렸다. 그들은 꼼짝도 않고 서서 불타는 장작더미를 보고 있었지만,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빠르게 올라가는 회색 연기를 따라 고개를 올렸다. 하늘에 종이연 몇 개가 태평하게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한 무리의 새들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다시 고개를 내렸다. 불은 점점 거세어져 단상 위에서 한 사람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이미 꺼져버렸던 생명의 불꽃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치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너무 평화로웠다. 장례식인데 우는 인도인도 없었다. 화장터 안에는 개와 소와 염소들이 자유롭게 쏘다녔고, 아이들은 연을 날리고 있었다. 아저씨들은 수다를 떨며 불이 더 잘 붙도록 바람을 불어댔다. 
화장을 지켜보는 이방인들만 유난히 저마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골똘히 빠져있을 뿐이었다.


 연기가 더 거세지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 맡아보는 종류의 타는 냄새였다. 한 사람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며 냄새를 맡으니 몽롱해졌다. 이윽고 약에 취한 듯 머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여태 괜찮았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옷으로 코와 입을 막고서 울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 간 마지막 흔적이 내 몸에 새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싹했다. 하지만 슬펐고, 이상하게 한편으로 마음이 안정됐다.




 화장터를 보고 돌아오는 길은 그 전과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는 생각이다. 맑고 차가운 물웅덩이에 짙은 색 물감 한 방울을 톡, 하고 떨어트린 느낌이었다. 
 사두(Sadhu; 힌두교 고행자)가 이 말을 들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다. 
 “바뀐 건 갠지스강의 풍경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자네의 마음일 걸세.”


 아까 같은 길을 지나갈 때 신나게 연을 날려 댔던 아이가 보였다. 연이 전깃줄에 걸려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연 끈을 이리저리 당겨보지만, 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아이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그 날 밤 잠에 들기 전 내 상태는 딱 그 아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전깃줄에 걸려버린 종이연을 쳐다보는 아이의 마음처럼 나는 이제 도통 무얼 해야하는지를 몰랐다.


 죽음을 마주하는 막연한 두려움은 화장(火葬)되어 연기가 되어버렸다. 그 연기는 물음표가 되어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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