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이 되면 아기들에게 이유식이라는 새로운 미션이 주어진다.
요정처럼 모유나 분유만 먹던 시기에서
어른들과 겸상할 시기로의 진화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 아기는 입이 짧고 몸무게도 잘 늘지 않는 편이라서
이유식이라도 먹이면 좀 달라질까 싶어 6개월이 되기만을 기다려왔다.
가장 먼저 이유식을 시작할 때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았다.
주변에 물어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검색하기도 했는데
준비할 것들이 너무 많아 하마터면 나는 이유식 만들기를 포기할 뻔했다. (이때 포기했어야 했나?)
냄비, 칼, 도마, 거름망, 저울, 각종 아기 식기, 아기 숟가락, 턱받이, 실리콘 얼음틀...
이래서 이유식 준비물을 '제2의 혼수'라고들 하나보다 싶었다.
최소한으로만 갖추어야지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가 쓰는 물건들을 사는 것만으로 진이 빠졌다.
나쁜 성분이 없어야 하고, 너무 싸거나 너무 비싼 것들도 제외했다.
아기 5개월이 시작될 무렵 시작한 쇼핑은 보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큰 냄비에 물을 팔팔 끓여 열탕 소독을 하면서
나는 '살림 좀 하는 엄마'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다음으로 이유식을 진행하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블로그와 유튜브에는 부지런하고 친절한 부모님들이 올려둔 정보가 많았는데
도저히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나는 이유식 만들기를 포기할 뻔했다. (이때라도 포기했어야 했나?)
이유식은 크게 초기-중기-후기로 나뉘고
쌀, 고기, 채소를 한데 넣고 갈아 만든 죽의 형태였다.
처음에는 쌀:물의 비율을 1:20 정도로 시작하여
점차 쌀의 비중을 높여가는 방식이었다.
아기가 한 번에 먹는 양은 50ml 정도인데 어른 밥숟갈로 서너 숟갈 정도 되어 보이는 양이었다.
쌀가루를 푼 물에 고기와 채소를 손톱만큼씩 계량하여 만드는 레시피를 보니
어릴 때 놀이터에서 모래로 밥을 짓고, 꽃잎과 열매를 빻아 반찬을 만들던 소꿉놀이가 생각났다.
이유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부터없는걱정사서하기병'을 앓고 있는 나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그렇게 내린 결론은 이유식을 하는 데 온 힘을 쏟지 말자는 것이었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계획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야만 속이 후련한 편이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지켜봐 온 나의 아기는 먹는 데 큰 흥미가 없었으므로
내 완벽한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채
세상은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남겨줄 게 분명했다.
나의 정신 건강과 우리 가족의 평화를 위해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
더불어 이유식을 만들 때 계량도 하지 않기로 했다.
국어 교사로는 드물게 이과 출신인 나는 숫자와 수치를 맹신하는 편이다.
매일 아침을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나오는 체중계로 아기 몸무게를 측정하고
증가 그래프의 기울기를 확인할 정도이다.
그런 나에게 이는 꽤 파격적인 방식이었다.
정확한 계량을 하는 대신 나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우리 아기는 누구를 닮았는지 벌써부터 예민하고 섬세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런 아기가 매일 같은 농도의 밥만 먹다 보면
나처럼 1g, 2g에 벌벌 떠는 사람으로 자랄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진 밥을 먹게 될 수도, 된 밥을 먹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귀신같이 매일 비슷한 농도를 맞추고 있다.
또 이유식을 한 그릇의 죽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
이 역시 평범하거나 무난한 것을 따르는 게 마음 편한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식당에 가도 늘 먹던 메뉴나 '인기' 혹은 'BEST'라 적힌 메뉴만 선택하는 나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여러 재료를 한데 모아 죽을 만드는 것이 어색했다.
향도 식감도 다른 재료들이 한데 섞여 있으면 재료 고유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 것 같았다.
입이 짧은 우리 아기에게 다양한 미각의 세계를 경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곡식으로 만든 미음, 고기반찬, 채소 반찬을 따로 준비하고
밥 한 숟갈에 반찬 한 가지 씩 곁들여 먹이고 있다.
이 방법으로 이유식을 준비하는 것은 설거지 거리도 세배,
먹이는 데 걸리는 시간도 세배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아기는 눈으로 보고, 코로 향기를 맡고, 손으로 질감을 느끼면서
그야말로 온몸으로 이유식을 먹으며 즐거워한다. 아기가 즐거워하면 그걸로 됐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아기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턱받이에 흘리는 게 훨씬 많지만
이제는 제법 숟가락질을 하기도 하고,
그릇을 자기가 들고 먹겠다며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육아는 한정판 경험이어서
"한 입만 더, 한 번만 더" 애원을 하는 때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겠지...
아기는 금세 자라 혼자 라면도 끓여 먹고, 짜장면도 시켜먹는 청소년이 되어버리겠지...
그날이 오기 전까지 이 황홀한 식사를 만끽해야겠다.
<남편의 참견>
우리는 비로소 식구(食口)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