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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천 Apr 16. 2018

인도의 풍습 - 사티(2)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나마스떼, 인디아입니다! 


지난번에 인도의 ‘사티(Sati)’풍습을

소개하면서 호기심이 깊어져 자세히 자료를 찾아보았다.  


인도의 베다(Veda)사상과 힌두교에는

수천 명의 神들이 있다. 그 중에서 브라흐마(창조), 비슈누(유지), 시바(파괴)의 三神을 가장 중요하게 섬기며, 중세 이후에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상이 들어오면서 힌두교에서도 삼위일체의 유일신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사티(Sati)’는

시바의 첫 번째 아내로 파괴의 신인 남편과 달리 우아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지닌 女神이다. ‘사티’의 아버지 ‘다크사’는 브라흐마(창조)의 엄지손가락에서 태어났다. 다크사는 딸이 결혼 적령기가 되자 많은 신들을 모아 사위를 정하는 의식을 진행하였다. 다크사는 그때에 시바의 성격이 워낙 난폭해서 시바만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사티는 자신의 남편 될 사람은 시바밖에 없다고 생각하였고, 시바 역시 사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결국 시바 없이 사티는 원하는 신에게 화관을 씌워 자신의 남편을 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티는 아무도 정하지않고 화관을 하늘 높이 던져버렸는데 시바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 화관을 받아쓰는 바람에 다크사는 더 이상 딸의 결혼을 반대할 수 없게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러하듯이 혼인을 허락했다고 해서 시바와 다크사의 관계가 좋아진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크사가 모든 신들을 초대하는 모임을 열었을때 다크사가 입장하자 두 명의 신을 제외하고 모든 신들은 그에게 인사를 하였다. 한 명은 다크사의 아버지인 브라흐마와 다른 한 명은 자신을 초대하지 않아 삐쳐 있던 시바였다. 건방진 사위의 행동에 화가 난 다크사는 시바를 비난하고, 시바에게 주었던 ‘세계의 수호자’라는 호칭도 거두면서 집으로 돌아가 시바는 초대하지 않고 그가 가장 싫어하는 제의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사티는 신들이 줄지어 있는 광경을 보고는 시바가 싫어하는 제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한사코 말렸지만 다크사는 자신의 의견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시바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사티’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였고, 결국 스스로 산 제물이 되기로 결심하면서 제단으로 걸어가 남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후,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운 '사티'는 힌두교도들의 가장 이상적인 아내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인도에는 ‘사티’라는 악습이 생겼으며, 그것은 남편이 아내보다 먼저 죽으면 살아있는 부인을 사티 여신처럼 태워 죽이는 관습이다. 1829년 영국 식민지정부가 법률을 제정하여 금지하였지만 지금도 가끔씩 비밀리에 행하고 있다고 전해온다.

비운의 왕비 '파드미니'

두 번째로

소개하고자 하는 관습은 사티와 관련있는 ‘조하르(Jauhar)’라는 슬프고도 섬뜩한 풍습이다.

‘조하르’는 침략자에 의해 포획되어 성노예가 되거나 강간을 피하기 위해 인도 아대륙의 일부 여성들이 전쟁 중에 패배를 당할 때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힌두교 관습이다. 이 관습은 사티(Sati)와 문화적으로 관련이 있으며, ‘Jauhar’는 적에게 완전한 패배가 예상됐을 때, 성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자신을 제물로 삼는 행위이다. 특히, 조하르는 힌두인 사이의 전쟁보다 이민족(힌두-이슬람)과의 전쟁에서만 관찰되고 있으며, 이를 두고 이슬람 종교학자 'ArvindSharma'는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마법적이고 미신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웅이다"라고 평하였다.  


다음은,

‘조하르’와 연관된 비운의 왕비 ‘파드미니’의 이야기이다.

일명, ‘노예왕조’로 시작한 이슬람 정권시대(1000-1526)하에 인도 서북부 라자스탄지역의 ‘라지푸트’족이 세운 ‘메와르’왕조가 있었다. 1303년,‘메와르’왕조 라탄 싱 왕은 아름다운 왕비 ‘파드미니’와 살고 있었다. 파드미니는 워낙 미모가 출중해서 그 소문이 멀리 델리왕국까지 퍼졌는데, 이에 델리의 술탄 ‘알라우딘 칼지’는 파드미니를 보기 위해 라자스탄으로 쳐들어 왔다. 그러나 파드미니는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애가 탄 술탄이 계속 파드미니를 만나겠다며 압박해 오자 파드미니는 술탄에게 통보하였다.


“나를 만나고 싶으면 먼저 무장 해제를 하고, 연못에 비친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만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술탄은 그렇게 해서라도 파드미니를 보고 싶었다.


드디어 호수 가운데 있는 여름궁전 계단에 파드미니가 서 있고 건너편 건물 벽면에 거울을 걸어 두었다. 술탄은 거울을 통해 호수에 비친 파드미니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미모(鏡中美人)에 반한 술탄은 결국 라탄 싱 왕을 붙잡아 가면서 파드미니에게 제안하였다. “자신과 하룻밤을 함께하면 왕을 풀어주겠다고…” 


왕비는 술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꽃가마 150대를 준비하고 시녀들과 함께 술탄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꽃가마에는 시녀들 대신 병사들이 변장하여 숨어 있었고, 파드미니와 시녀들이 온다는 소식에 술탄은 물론이고 병사들까지 들떠 있는 틈을 타서 붙잡힌 왕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이에 격분한 술탄은 치토르가르(Chittorgah)성을 총공격하였고,

성이 함락될 무렵 '파드미니'왕비와 라지푸트 부인들은 자녀들을 피신시킨 다음 그녀들이 결혼식때 입었던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으로 갈아입은 다음 불타는 장작더미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 수가 무려 16,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죽음을 지켜본 라지푸트 전사들은 아내의 재를 이마에 바르고 자신들은 주황색 전투복으로 갈아입고 마약으로 몸을 마취시킨 다음에 온몸이 부서지도록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치토르 성 치토르(Chittor)에서 두 번째 자하르는 1528년에 일어났으며,

세 번째 자하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굴제국의 술탄 ‘악바르’가 쳐들어왔을 때(1568)였다.

라지푸트인들은 몽골제국의 후예들의 침공을 ‘자이말’과 ‘파타’의 지휘아래 6개월 동안 굳건하게 대항하였다. 그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던지 악바르는 치토르성 함락한 이후 본국의 성 ‘아그라(Agra)’ 성문앞에 그들의 동상을 세워 주기도 하였다. 치토르성 함락되기 전날, 일만 여명의 부녀자들은 '자하르'를 시행하였고, 수천 명의 전사들은 saka의식(마약에 취하는)을 걸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568년 봄, 치토르성에 진입했을 때, 그곳은 "거대한 화장터"였다고 전해온다. 인도 사람들은 이들에 죽음의 의식을 ‘조하르(Johar)’라고 부르면서 애도의 끈을 세대를 통해 이어가고 있다.

치토르 성

Namaste,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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