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라노]
류정한.
뮤지컬계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고 보는 배우인 그의 첫 연출작 <시라노>.
'내용이 길고, 웃음에 욕심을 부렸다' 정도의 정보와 대략의 스토리만 알고 공연장을 찾았다. 이 날은 연출자인 류정한과 천상지희 출신의 린아, 그리고 서경수가 캐스팅된 날-
큰 코 콤플렉스를 지닌 글 재간이 좋은 시라노, 외모는 뛰어나지만 말주변이 없는 크리스티앙, 사랑의 방해꾼 드 기슈 백작 그리고 세 남자의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록산. 네 명의 인물이 중심이 되는 이 공연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코미디에 가깝다. 하지만 사실은 네 사람 중 누구 하나 행복하지 않았던 슬픈 이야기다.
그렇다.
이 공연은 조금 더 인물 표현에 깊이가 있어야 하고, 결국엔 슬픔을 느껴야 하는 감성적인 공연이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집에서 심심하긴 한데 딱히 할 일은 없어서 TV를 켰더니 얼굴을 아는 배우가 나오는 독립영화가 하길래 끝까지 보긴 봤는데 '이런 게 독립영화인가? 그래도 시간은 잘 때웠구나' 같은 기분이 드는 그런 공연이랄까.
종종 웃긴 했는데 재미있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고,
뮤지컬이긴 한데 그냥 연극으로 해도 됐을 만큼 남는 넘버도 없고,
허술한 부분은 없는데, 잘 만들었다는 느낌도 없는 그런 공연 말이다.
그래도 남는 게 있다면, 린아의 목소리
공연 초반 린아가 처음 대사를 했을 땐, '아 망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노래를 들어보니 이 분,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참 잘하더라. 연기만 되면 나중에 잘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무슨 배역에 어울릴까 생각해 보니 <몬테크리스토>의 메르세데스나 <모차르트!>의 콘스탄체에 제격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근데 역시나 내가 여행 중이라 놓친 작년 <몬테크리스토>에서 메르세데스 역을 했었다고!
천상지희 출신이라는 얘기를 듣고 찾아보니 천상지희의 '상'을 담당 '상미(上美, 천상의 아름다움) 린아'란다. 뮤지컬도 꽤 한 것 같은데, 잘 맞는 배역을 선택한다면 골라서 보고 싶을 만큼 나중이 기대되는 배우랄까.
연출에 출연까지, 열 일하는 류정한
시종일관 무대에서 시를 찬양하고, 노래를 하고, 칼을 휘두르는 시라노는 세상 바쁜 배역이다. 다행히 그런 그에게 그리 힘들어 보이는 넘버는 없었다. 물론 이건 류정한이었기에 그렇게 느꼈을 거다. 보는 내내 한편으로 걱정이 됐다. '김동완이 이걸 어떻게 하지?' 같이 캐스팅된 홍광호는 어떤 느낌일지 감이 오는 반면, 김동완은 엄청 궁금하긴 한데 돌아다니는 영상 하나가 없다. 그래도 두 번은 안 보는 걸로.
제작비는 어디에 쓰셨나요
티켓값이 너무 비싼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제작비 사용 내역이 궁금한 공연이다. 남자 앙상블은 단벌 신사고, 여자 앙상블은 단벌과 수녀복 두 벌뿐이다. 무대 세트는 고정이며, 빵집과 전쟁터 그리고 달이 떨어지는 걸로 모든 장면이 해결된다. 여름이라고 초록 나뭇잎이 내려오고, 가을이라고 갈색 나뭇잎이 떨어지는 건 학예회 무대에서나 나오는 설정이 아니던가!
미니멀한 무대가 설정이었다면 더없이 컨셉에 충실한 무대였다. 그나마 색감이 예뻤던 조명이 크게 한 몫하지 않았나 싶다.
셋이 보러 갔다가 한 명은 너무나 힘든 3시간을 보냈고, 나는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을 받았고, 나머지 한 명은 물개 박수를 치며 너무나 재미있게 공연을 보고 나왔다.
공연은 10월 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