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사람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법
큰아빠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성장한 과정을 모두 지켜본 사람 중 가장 큰 어른,
직계라고 생각하는 가족 중에 처음으로 내 곁을 떠난 사람.
가는 데 순서 없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가족은 순서를 잘 지키고 있다.
외조부모와 친할아버지는 꽤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돌아가신 지 몇 년 안됐지만, 돌아가시기 전에도 자주 뵙지 못했다.
아빠는 아들 넷, 딸 둘 남매 중 셋째, 아들 중엔 둘째다.
고모들은 시골에 사셔서 왕래가 많지 않았지만 서울에 사는 큰집과 우리 집은 어릴 때부터 꽤 가깝게 지냈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초등학교 때에도 주말이면 오빠 손을 잡고 동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구로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신림동 큰 집에 가곤 했다. 큰엄마가 워낙 깐깐하고 깔끔해 우리 집 행주보다 큰 집 걸레가 깨끗할 정도라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촌 오빠들과 보내는 주말이 좋았다.
명절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큰 집에 모여 큰아빠의 봉고차를 타고 두 식구가 같이 홍천 할아버지 집으로 내려갔다. 달달한 박카스가 먹고 싶어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면 어느새 내 손엔 차 안에 숨겨져 있던 박카스가 쥐어져 있었다.
내 기억이 남아 있는 순간부터 컸을 때까지 꽤 오랜동안 셋째와 넷째 삼촌은 노총각들이었고, 그래서 난 우리 집안에 유일한 막내딸이었다. 그러니 딸을 낳았다고 구박했던 할아버지뿐 아니라 온 식구에게 예쁨을 받았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매년 명절에 큰 집에 갔었는데, 결혼 후에는 시댁과 친정만 갈 뿐, 큰 집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다 몇 년 전 명절 당일에 큰 집에 갔었는데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때가 큰 아빠를 마지막으로 뵌 때인 것 같다.
그러다 마주한 부고-
80이 다 된 큰 엄마의 까칠한 손과 야윈 몸을 안은 순간 드는 미안함.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여전히 일상을 살고, 큰 집엔 또 자주 가지 못할 걸 이미 알고 있다)
3일 장을 끝내고 도착한 화장터-
내가 화장터를 간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대학 때 친구의 아빠, 그리고 작년 친구의 아빠.
어린 나이에 처음 화장이라 그랬을까,
난 지금도 화장이 끝나고 유리 너머로 가루가 되어 나타난 친구 아빠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뜨거운 불로 들어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유족의 마음은 찢어지는데, 꼭 그렇게까지 가루가 되어 남겨진 모습을 보여줘야 했을까. 가루가 된 모습을 쓰레받기로 쓸어 납골함에 담는 모습까지 보여주면서 '이 가루가 당신의 가족입니다. 나는 한점 바닥에 흘리지 않고 잘 쓸어 담았습니다'를 확인시켜줘야 하는 걸까.
대학 때 친구 아빠의 그 모습을 마주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난 지금도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가면 가급적 화장터에서의 마지막 모습은 보지 말라고 얘기한다. 내 가족이 떠난 모습의 마지막을 뼛가루로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번에도 역시 그랬다. 뜨거운 불에 어떻게 남편을 보내냐고 오열하는 큰엄마를, 마지막 가는 모습은 봐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빠들에게 얘기해 그 모습을 보지 않게 했다. 가루가 아닌 살아생전 잘생긴 얼굴만, 좋은 모습만 기억하게 하자고.
꼭 그런 투명 유리창 너머로 떠나는 이의 마지막을 바라보게 해야 할까.
시신이 바뀔까 봐, 일하는 분이 성의 없이 할까 봐 라는 염려라면 조금 불투명한 창을 두거나 가족 한 두 명 아니면 상조회사 직원 분만 볼 수 있게 하면 안 되는 걸까. 물론 마지막 가는 모습을 모두 보고 싶어 하거나, 그 순간에도 함께 하고 싶은 유족도 있겠지만-
앞으로 화장터에 갈 일이 더 잦아질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마지막을 까만 재로 남길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