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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솔이제철 Nov 25. 2022

9/ 엄마에게 귀국 티켓을 건넸다.

직장을 그만두고 스페인 여행길에 오른 30대 딸, 은퇴 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부모님과의 140일간 산티아고 순례 배낭여행을 기록합니다.


2,887km 찐으로 걷는 배낭여행

✅프랑스길 Camino Francés (2018)

✅피스테라, 무시아 Camino de Fisterra y Muxía (2018)

✅은의 길 Vía de la Plata (2022)

✅북쪽 길 Camino del Norte (2022)

✅영국 길 Camino Inglés (2022)



길을 시작한 지 20일 차, 은의 길도 어느덧 절반 정도 걸어왔다. 여행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지쳐있다. 길이 어려운 건지, 내 체력이 미처 준비가 안됐던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걷는 게 힘겹다. 길을 즐기기는 커녕 은의 길이 언제 끝나는지 디데이를 카운트하며,  오늘하루의 마감 만을 바라는 마음이 지배했다. 귀한 시간을 만들어서 온건데, 이런 마음가짐으로 지내는 나 스스로에게 불만족스러웠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질질 끌며 은의 길 절반을 왔다.

걸음 하나를 옮길 때는 모른다. 하지만 지도를 보면 앞으로 가고 있구나 새삼 실감한다.


엄마도 점점 뒤처지기 시작한다. 기력이 달리고 매일의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식사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니 체력 소진은 더욱 빨랐다. 악순환이었다.

무엇보다 은의 길 특유의 고독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은의 길을 오기 전까지 엄마에게 있어 산티아고 길은 프랑스 길이 전부였다. 프랑스길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로 북적였고, 매일 만나는 길은 다채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산티아고 순례 여행은 ‘고되지만 즐거운 곳’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지금까지 걸어온 절반의 은의 길은 프랑스 길과는 정확하게 반대였다. 길은 외로웠고, 지루했고, 끝나지 않았다.


종일 그늘 하나 없는 평야를 걸어야 할 때가 많다. 게다가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한국인은 고사하고, 길 위에서 만나는 순례객은 많아야 하나 둘이었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막막했다. 매일같이 우리 셋만 길 위에 덩그러니 있었다. 게다가 여행 이틀째에 내가 갑자기 쓰러졌으니, 이후에도 내내 심리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다녔을 거다.

그녀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피로가 불만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걷는 것 그 자체는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은의 길을 반이나 왔지만, 아직은 여행 초반이다. 우리는 이 코스가 끝나고 스페인 북쪽 해안을 따라 걷는 ‘북쪽 길’을 연이어 갈 계획이었다. 아직 여행은 2개월이 넘게 남아있다. 이런 상태로 엄마가 몇 개월을 더 스페인에서 지낼 수 있을까, 건강을 혹사시키면서 여행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엄마, 서울로 먼저 갈래?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조기 귀국을 제안했다. 그녀의 건강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더는 찾지 못했다.

엄마는 커피를 많이 못마셔 콜라, 주스, 따뜻한 우유를 먹는 편이었다. bar를 만났을 때 가장 행복하다


티켓 변경부터 이동 경로, 향후 일정까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엄마는 조금 더 참아보기로, 조금 더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혼자서 먼저 돌아간다는 것이 도저히 스스로 용납 안됐을 테니.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이 날 엄마의 결정에 두고두고 감사할 뿐이다. 만약, 그때 정말 돌아갔더라면? 아빠가 정성껏 준비한 여행, 엄마의 든든한 지원, 내가 부모님과의 동행을 결심했던 결단, 이 모든 것이 미완성되어 깊은 후회로만 남았을 것이다.


참 섣부른 제안이었다. 분명 그때의 나는 엄마만큼이나 약해져 있고 예민한 상태였음에 틀림없다. 엄마의 힘듦을 위로하고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당시의 나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스트레스가 전가된 카드를 오히려 엄마에게 내민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상처로 받아드릴 수 있는 일방적인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을 선택하고, 우리의 여행이 어설픈 끝맺음이 되지 않게 만들어준 엄마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녀가 진짜 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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